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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25. 2024

그 어느 것 하나, 오빠가 새겨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2장. 무너져도 될 이유보다, 무너지면 안 될 이유가 더 많아서(1)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정승환의 <눈사람>을 돋고 있자면, 오빠 생각이 많이 나. 당신과의 소중한 추억이지만, 그 추억으로 인해 당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막는다면 부디 나를 잊어도 된다는. 당신과의 추억을 나는 영원히 간직하고 있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잊어도 된다는 말. 처음에는 오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어느 순간부터는 오빠를 향한 내 마음이기도 하지만, 날 향한 오빠의 마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오빠, 오빠와의 추억 없이는 내게 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오빠와의 추억이 있어야, 비로소 나의 봄은 완성돼. 그러니, 여태껏 그랬듯 앞으로도 내 모든 순간에 함께해 줘. 비록 다른 곳에 있지만, 우리 함께 봄을 맞이하자.


그 어느 것 하나, 오빠가 새겨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살 유가족이자,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유


오빠의 죽음을 겪고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날 보며, 내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겨냈냐고 묻곤 했다. 몇 마디 문장으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지독하고 힘겨웠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만약 불합격했을 때 오빠 핑계를 대기 싫었다고 말하며 그 시간을 뭉뚱그렸다. 그 시간을, 긴 호흡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먹었고, 이런 생각을 하며 버텨냈다고.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오빠를 떠나보내고 나서, 무너진 가족의 지지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 시린 겨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봄을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했다.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텨내, 준비하고 있던 공무원 시험을 합격한다면 우리 가족에게 작은 희망의 새싹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내 하루 일과는 6시 30분에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바로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독서실에 도착하면 7시. 오전 공부를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영어단어를 외웠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오후 공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쯤이면 거의 6시였고, 또 편의점에 가서 저녁으로 김밥을 먹으며 사자성어를 외웠다. 23시가 되면 공부를 마치고 짐을 쌌다. 집에 가서 이삼십 분 남짓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샤워하고, 단 두 벌뿐이었던 ’ 독서실복‘을 입었다. 아침 준비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자 양말까지 신고 잤던 것 같다. 방에 들어가 묵상을 하며 오빠의 안녕을 기도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학기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틈틈이 대학교 온라인 수업을 듣고(코로나 19로 인해 강의가 모두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기에), 과제를 했다. 그렇게 학부생이자 수험생으로 하루를 채워나갔다. 이렇게 써 내려가면 그저 여느 수험생과 다를 것 없는 하루 루틴으로 보인다. 이 단조롭게만 보이는 내 수험생활은, 내가 여태껏 겪었던 그 어떤 고해보다 더 지독했다. 오빠를 잃은 뒤 이어나갔던 7개월의 수험기간 중, 단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오빠의 부고 소식과 행정법


 내가 준비했던 9급 공무원 시험 과목은 국어, 영어, 한국사, 행정법, 사회였다. 오빠를 잃고 나서 처음 스터디 카페를 앉았을 때 처음 폈던 과목은 행정법이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날 무렵 공부하던 과목은 행정법이었다. 2021년 6월(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있는 달)까지 적어놓았던 월별 계획을 맞추기 위해서는 밀려버린 행정법 진도부터 따라잡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페이지를 폈는데, 오빠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분명, 고요하기만 한 스터디 카페였는데, ‘오빠한테 가야 해’, 눈이 빨개져서 울먹거리던 언니의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듯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공부를 손에서 놓은 삼주 동안 열심히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펼치니 다잡았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빠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그때부터 오빠의 장례식, 오빠 집을 정리하던 그 시간이 머릿속에서 계속해 재생되었다. 눈으로 아무리 글자를 읽어보아도, 머릿속은 온통 오빠가 떠난 뒤 겪었던 시간들 뿐이었다. 머릿속을 비워보려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주먹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물이 자꾸 책에 떨어졌다.


 스터디 카페에서의 첫날은, 소리 없는 눈물만이 있던 날이었다. 감정을 잡아보고자 두 입술을 꽉 깨물어도, 이를 악물어도, 두 주먹을 꽉 쥐어도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잉크 펜이 번지고, 형광펜이 번져도, 머릿속에 글자가 하나도 안 들어와도 계속 책을 붙잡고 있었다. 끝없이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눈앞이 흐려져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밑줄을 긋고 글자를 읽어 내렸다. 차마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울면서 슬퍼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빠의 유품을 실은 카트에 발이 밟혀 인상을 찌푸렸던 사람처럼, 내가 어떤 슬픈 일을 겪었대도 세상은 그 일로 나를 봐주지 않으니까. 내가 그런 힘든 일을 겪었고, 여전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해도, 틀린 문제를 맞았다고 해주진 않으니까. 내가 우리의 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리만큼 끈질기게 책 속에 있는 정보를 머릿속에 넣는 일이었다.



떠나간 이들을 노래하던, 국어


 울면서 처음 공부한 과목은 행정법이었지만, 수험 생활이 끝날 때까지 날 울린 과목은 국어였다. 오빠의 죽음을 겪기 전에는 문학 파트를 제일 좋아했다.(공무원 국어 시험은 크게 문법, 독해, 문학 파트로 나뉜다.) 시대 혹은 개인의 상황 속 작가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문학작품이 좋았다.  기출문제를 통해 고전과 현대, 시와 소설을 넘나드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어서 문학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내가 좋아서 하는’ 공부였다. 잔뜩 과열된 머리를 식히는,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빠 일을 겪고 난 후에는 국어 공부가 제일 고역이었다.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사람의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문학. 전에는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을 제일 좋아했는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다룬 작품들이 어찌나 많던지. 언제나 그들이 전하는 슬픔은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공무원 시험 교재 중 눈물 때문에 가장 쭈글쭈글한 과목은 단연코 국어 문학 파트였다. 그 때문에 실력과는 상관없이 가장 걱정이 많았던 과목이었다. 수험장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다룬 작품이 나와도, 그 작품이 전하는 감정에 무너지지 않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했기에.


 그때의 나는, 넘쳐흐르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을 줄밖에 몰랐다. 차분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상실의 상처를 치유해 나갈 시간적인 여유도, 심리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저 넘실대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그 위로 얇디얇은 덮개를 쌓아 올릴 뿐이었다. 덮개가 사정없이 부서져 감정이 흘러넘치는 날에는, 오빠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 오빠가 공무원 수험생이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 오빠가 기출문제를 풀다가 이런 작품을 마주하고 무너져 내리는 상황.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편해지자고 오빠를 저렇게 고통 속에 몰아넣다니. 만약 내가 그때 목숨을 끊는 선택만 안 했어도 우리 오빠는 시험에 붙었을 텐데.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영혼이 닳도록 빌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늘에서 우리 오빠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힘들었던 사람이었고, 감당해야 할 고통을 감내한 사람인데, 그곳에서도 미안함 때문에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있진 않을까. 혹여 미안함과 죄책감에 울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 끝에는 언제나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그리고 더 튼튼한 덮개로 감정을 덮어두었다.



오빠가 좋아했던 한국사


 한국사. 역사는 오빠가 참 좋아하던 과목이었다. 오빠를 닮고 싶었던 어린 나는, 역사에 호불호가 없었음에도 ‘나도 역사가 좋아’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 좋다, 좋다 하니 어느새 나 또한 좋아하게 된 과목이었다. 그리고 오빠와의 추억이 가장 짙은 과목이기도 했다. 왜 이리도 깊숙이 새겨졌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오빠는 고구려가 제일 좋다고 했다. 신라는 야비하고 백제는 우유부단하지만, 고구려는 씩씩하고 용맹해서 좋다고. 유치원생이던 나는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도 오빠를 따라 ‘나는 고구려가 제일 좋아’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고, 한국사를 제대로 배운 후에도 별생각 없이 말하고 다녔다. ‘난 고구려가 제일 좋아. 신라는 비겁하고 백제는 우유부단하잖아. 그런데 고구려는 용맹해.’ 역사를 좋아하고, 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고구려를 제일 좋아하는 건 온전히 내 취향인 줄만 알았다.


 콕 찌르면 살수대첩이 어느 나라에서 누구 왕 때 몇 년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줄줄 나올 정도로 한국사를 공부한 뒤에서야 깨달았다.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대부분은 ‘오빠를 동경하던’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었구나. 동경하던 오빠를 닮고 싶어서 오빠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좋아한다고 했고, 오빠가 하는 거면 나도 했던 시간이 쌓여 내 취향이 됐구나. 용맹하지만 잔인했던 고구려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오빠는 우유부단하다고 했지만, 정적이고 소담스러운 백제가 오히려 내 취향이었다. 역사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 내 취향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던 것들의 시작 계기는 오빠였다. 오빠가 좋아하니까, 오빠가 하니까. 그렇게 동경하던 오빠였는데, 왜 나는 점점 오빠를 싫어했을까. 한국사 공부를 할 땐 유독 오빠에 대한 글을 많이 적어 내렸다.



오빠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던 영어와 사회조차


 영어와 사회조차도 오빠로 가득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오빠에게 ‘인칭 대명사’ 문법을 알려준다고 ‘I My Me Mine You Yours You Yours…’를 같이 외우자 아직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면서 같이 하겠다고 응석을 부렸던 기억. 이과생인 주제에 치사하게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던 오빠에 대한 기억. 고3 때 영어 인강을 듣고 있는 내게  뜬금없이 다가와 이 선생님 자기 공부할 때 공무원 시험 강사였는데 언제 수능시험 강사로 넘어갔냐며 말을 걸던 오빠에 대한 기억. 사회에서 경제 파트 문제를 풀고 있노라면, (오빠가 공부했던 경제와 내가 공부했던 경제의 난도 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겠지만) 오빠도 이런 경제 문제를 풀었을까, 수학을 잘하는 오빠는 뚝딱뚝딱 풀었겠지, 하며 오빠를 그렸다.



수험생, 그 모든 순간에 오빠가 있었다.


 점심과 저녁,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지갑을 꺼내는 순간마저도 오빠가 떠올랐다. 이 지갑, 오빠가 대학교 입학 선물로 사줬던 건데, 고맙다는 말은 제대로 했던가. 그렇게  오빠 생각에 대한 물꼬가 터지면 둑이 터지듯 오빠에 대한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평소에 친하지도 않고, 서로 떨어져 사느라 자주 보지도 못하고, 카톡이나 문자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가끔, 돈은 안 부족하냐고 물어오던 오빠. 오빠 일이 있고 난 후, 집에 들어오고 나선 부모님의 풍족한 지원 속에 공부했다. 거기에 막내 삼촌도 다달이 용돈을 보내줬다. 오빠 일이 있기 바로 직전의 그때는 그렇게 돈에 허덕이며 살았는데, 오빠 일이 있고 난 후에는 통장에 돈이 자꾸만 쌓여갔다. 그게 마치, 내게는 오빠의 목숨값 같았다. 오빠의 목숨값으로 주린 배를 불리는 듯한 죄책감은 수험 기간이 끝나는 날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공부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담배를 피울 때는 지갑 속 넣어둔 오빠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는 담배를 꽤 자주 피우던 시기여서 한두 시간에 한 번씩은 담배를 피웠던 것 같으니, 하루에 9-10번씩은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사진 속의 오빠와 대화했던 것 같다. 말을 거는 사람은 있지만 답해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대화를 끈질기게도 이어나갔다. 오빠, 거기는 어때? 거기서는 부디 마음 편하게 지내. 걱정도 말고, 미안해도 말고. 그냥 오빠만 생각하면서 마음껏 자유로워. 내가 슬퍼하느라 나락에 빠지고, 공부도 내팽개치고 있으면 오빠가 걱정할까 봐, 미안해할까 봐 나는 오늘도 펜을 잡고 교재에 밑줄을 그어.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동경하던 오빠가 우리 동생 좀 한다? 하며 기특해할 것 같아서. 오빠가 기특해할 하루들이 쌓여서 시험에 합격하면, 오빠가 자랑스러워해 줄 것 같아서. 그리고 오빠가 미안한 마음을 좀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도, 슬퍼하는 대신 그 슬픔을 태워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오빠도,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걸 연료 삼아 더 열심히 자유로워지고 더 열심히 행복해해 줘.


/


 수험생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집, 스터디카페, 편의점, 집. 밥, 공부, 밥, 공부, 잠. 그 단조로운 곳에 어느 곳 하나 오빠가 없던 곳이 없었다. 그 단조로운 것에 어느 것 하나 오빠가 없던 것이 없었다. ‘나’를 생각하면 슬픔에 빠져 무너져 버렸지만, ‘오빠’를 생각하면 슬픔을 태워 공부를 해야 했다. 내 슬픔조차도 오빠에겐 죄책감이라는 짐이 될 것 같아서. 내 감정보다는 오빠의 행복을 우선시하고 싶었다. 오빠를 위한다면 슬퍼하는 감정을 온전히 음미하고 있는 시간조차도 내겐 사치였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내’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나오는 감정이었다. 나보다는 가족을, 그리고 오빠를 생각한다면 지금 나는 감정에 빠져있을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 했다. 오빠가 미안함 따위는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하기 위해, 슬퍼하는 가족에게 따스한 봄의 시작을 가져다주기 위해.



멀리 배웅하던 길 여전히 나는 그곳에 서서 그대가 사랑한 이 계절의 오고 감을 봅니다.
아무 노력 말아요. 버거울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잊어요.

꽃잎이 번지면 당신께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시간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그 다음 말은 이젠 내가 해줄 수 없어서 마음속에만 둘게요.

꽃잎이 번지면 그럼에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한참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끝 눈이 와요. 혹시 그대 보고 있나요.
슬퍼지도록 시리던 우리의 그 계절이 가요.

마지막으로 날 떠올려 준다면 안 되나요.
다시 한 번 더 같은 마음이고 싶어

우릴 보내기 전에 몹시 사랑한 날들
영원히 나는 이자리에서

                                    - 정승환,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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