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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1. 2024

속죄하는 마음으로

제2장. 무너져도 될 이유보다, 무너지면 안 될 이유가 더 많아서(3)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의 삶을 볼 때, 사람들은 본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판단하기 쉬운 ‘결과’에 집중한다. 과정은 겪은 이가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르지만, 결과는 굳이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오빠의 일을 겪고 난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나를 보며 가족과 주변인들도 ‘결과’를 보곤 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시험에 합격했다는 결과는 명확하게 알 수 있으니까. 그들이 내 결과에 집중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는 나밖에 모르니까.

 다른 이들이 볼 때, 나는 오빠의 죽음을 잘 이겨내며 시험에 합격한 자살 유가족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문장으로 풀어내기엔 내가 겪었던 시간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렸고, 무너져만 있을 수 없기에 다시 일어나야 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 ‘무너짐’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 일기장과 스터디 플래너만 알고 있던 그 시간을 풀어내며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당신이 지금 무너지는 시간을 겪고 있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무너져서 다시 일어날 힘이 없다면, 낮은 곳에서 떠나간 이를 추억하면 되는 거라고.

낮은 곳에선, 떠난 이가 남기고 간 사랑에 더 흠뻑 젖을 수 있을 테니.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오빠


 공부를 하다 짙게 떠오르는 오빠 생각에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주먹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고, 메모장이나 공책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처 없이 써 내려가는 일. 내 안에 존재하는 바다에는 매일같이 파도가 휘몰아쳤다. 집채 만한 파도에 온통 젖은 날도 있었고, 끝없이 철썩대는 파도에 울렁거리는 속을 움켜쥐는 날도 많았다. 파도에 매일같이 흔들렸다. 파도는, 버거웠지만 견딜 만은 했다. 하지만 가끔, 자비 없이 몰아치는 폭풍을 만날 때는 정처 없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크게 무너졌던 적은 오빠와 나누었던 메시지들을 정리했을 때였다. 오빠의 사망신고를 마치고, 얼마 후 오빠의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오빠의 카카오톡 메신저마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와의 추억이 극히 적은 내게는, 주고받은 메신저 속 몇 안 되는 문장조차 너무 소중했다. 메신저가 없어진 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오빠와 나눈 문자, 오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들, 오빠와 나누었던 카카오톡 메시지들을 정신없이 캡처했다.

 오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배경 화면들을 캡처했다. 오빠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구나. 이 시기에 오빠는 이런 다짐을 했구나. 이 시기에 오빠는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생활을 했구나. 관심이 없었던 오빠의 삶이 하나씩 새겨졌다. 오빠에게 대해 워낙 관심이 없었던 지라, 오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을 캡처하고 있노라니 ‘더 이상 오빠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오빠는 이 시간 속에 멈춰있을 거라고. 오빠의 모습은 31살에 멈춰버렸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가는 다른 이들의 사진과는 다르게, 오빠의 사진들은 이제 여기서 멈춰버렸다고. 그리고 그 사진들마저도 지금 캡처를 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거라고. 이전까지는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오빠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워낙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고, 연락도 소원했던 사이었기에 어딘가에는 오빠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 오빠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캡처를 하고 있는 그 순간 절실히 와닿았다. 오빠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빠의 사진을 캡처하며 오빠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다. 이제는 화면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오빠여서. 사진이 담고 있는 정보는 너무 한정적이었다. 오빠가 인상 찌푸릴 때는 어땠더라, 오빠가 의식하지 않고 환하게 웃을 때는 어떤 모습이더라, 오빠가 말할 때는, 오빠의 목소리는, 오빠의 습관들은. 화면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남겨지지 못한 오빠의 모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겠지. 아무리 빠져나가는 추억들을 그러모아도 오빠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기억하는 오빠의 모습이 적어지면, 오빠는 정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무서웠다.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서웠다. 내게 남겨진 오빠의 모습이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언젠간, 오빠의 존재마저 흐릿해질 그 시간이 무서웠다.



오빠는, 무언갈 항상 주려고 했어


 오빠의 멈춰버린 시간이 슬펐고, 오빠의 존재가 흐릿해져 버릴 그 시간이 무서웠다. 화면 속에만 존재하게 된 오빠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가장 속절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무너져 내렸던 때는 오빠는, 자꾸 무언갈 주려고 했던 걸 깨달았던 날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가족에 대해 말할 때, 오빠에 관해 물어보면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말하곤 했다. 연락도 안 하고, 교류도 없다고. 오빠와는 주고받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게 마음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오빠랑 연락을 주고받았던 기억도 별로 없고, 서로 안부를 챙기지도 않고, 그냥 오빠가 본가로 왔을 때 잠시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전부라고. 오빠와 나 사이에는 무언가가 오고 간 적이 없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오빠와 주고받은 문자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캡처하며 그간 오빠와 나눈 대화들을 찬찬히 뜯어봤다. 항상 먼저 연락을 한 건 오빠였다. 그리고 그 연락의 첫마디는 매번, ‘용돈은 안 부족하냐?’였다. 그리고 나는 무뚝뚝하게 ‘아니. 괜찮아.’라는 답변을 보냈다. 그 외에도, 오빠가 일하는 직장에서 대학생 서포터스를 뽑는데 거기 신청해 보라고, 스펙이 스펙을 부르는 법이라고 말하던 오빠의 메시지. 자기가 요즘 사주 공부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어떤 성향이고 그 사이에서 넌 어떤 성향이어서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네가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부분을 키워야 한다고.


오빠는 매번, 내게 무언갈 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빠의 연락들을, 혹은 마음들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걷어내었다.

 돌이켜보면 오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내가 처음 핸드폰을 산 계기는 오빠였다. 그때 당시 오빠는 대학교 1학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오빠가 갑자기 ‘네 친구들은 거의 다 핸드폰 있지?’ 물어왔고, 나는 별생각 없이 ‘응, 거의 다 있지’라고 대답했다. 그 길로 오빠는 나를 데리고 통신사 매장으로 가 핸드폰을 사줬다. 그리고 군대 가기 직전까지 내 핸드폰 요금을 내줬다. 그때 오빠가 했던 말은 ‘내가 군대 가면 엄마아빠가 휴대전화 요금 내주겠지. 내가 이렇게 스타트 안 끊어주면 너도 우리(오빠와 언니)처럼 수능 끝나고나 핸드폰 생길걸’. 그냥 그렇게 담백하게 말하고 끝냈다. 그 외에도 오빠가 ‘너 나이키 운동화 있냐?’하고 사줬던 신발, 대학교 입학 선물이라고 사줬던 지갑.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해줬던 숱한 조언들. 그런 것들을 주면서 오빠는 시종일관 ‘담백’했다. 으스대지도 않고 생색내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오빠는 대학생이니까, 직장인이니까, 나보다 돈이 많으니까.’하고 쉽게 넘겼다. 나중에 오빠와의 사이가 정말 틀어졌을 때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 그냥 자기만족 때문에 그런 거겠지’하며 감사는커녕, 그 의도마저 비뚤게 보곤 했다.

 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숱한 걸 받았고, 그것들을 당연하게만 여겼다. 어른이 되면 다 그러는 줄 알았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나니 깨달았다. 그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건 없었다고. 가치를 몰라주는 상대는, 어여쁜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내가 자격이 없어서 받지 못한 거였는데, 오빠가 주지 않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항상 주려고 했던 오빠의 모습에, 나는 오빠에게 무엇을 해줬지, 돌이켜봤다. 비참하리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는 나보다 돈도 많은데, 오빠랑 친하지도 않은데, 하며 무언가를 줄 생각조차 안 했다. 오빠에게 정말, 그 무엇도 준 게 없었다. 흔한 생일도 챙겨주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취업, 직장 생활 시작 같은 삶에서 축하받아야 할 때조차도. 그렇다고 오빠에게 재롱을 부리는 동생도 아니었고, 오빠에게 힘이 되어주는 동생도 아니었다. 만나면 데면데면하게 자리를 피하는 게 전부였던 동생일 뿐이었다.


항상 주려고 했던 오빠와 그 가치를 몰라주는 동생. 외면하고만 있던 오빠와 나의 관계에 대한 정의였다.



마지막까지도 주려고 했던 오빠였는데.


 마지막까지 무너지게 했던 건, 오빠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오빠의 마지막 추석 때의 일이다. 아빠와 심하게 다투고 집에 나와 하루하루 가난하게 공부하던 그 상황에, 악이 바짝 올라 원망을 연료 삼아 공부하던 시기였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추석이어서 오빠도 오고, 맛있는 거 잔뜩 사놨으니까 집에 오는 거 어떻겠냐고.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집에 안 간다고. 그렇게만 달랑 보낸 후 핸드폰을 덮고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가족은 보기 싫고, 추석에조차도 김밥 한 줄, 샌드위치 하나로 때워야 하는 상황에 악이 잔뜩 올랐다. 그렇게 세 시간을 쉬지도 않고 공부하다, 쉬는 시간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음모드였던 핸드폰에는 엄마에게 찍힌 부재중 전화 한 통과 카카오톡 메시지 여러 개. 오빠가 맛있는 것도 잔뜩 사 왔다고,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혹시 모르니까 학교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 하나. 그리고 찍힌 부재중 전화 한 통. 그리고 두 시간가량 뒤에 온 메시지 하나, 오빠랑 학교 앞에서 기다렸는데(그때 당시 대학교 주변에서 자취하는 친구네 집에서 얹혀살았다), 막내딸이랑 연락이 안 돼서 그냥 간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오빠에게 전화가 왔었다. 엄마 아빠가 걱정하니까 가출 청소년은 그만하고 집에 들어오라고. 장난스러운 오빠의 전화를 듣고 짜증이 났다. 오빠가 뭘 안다고. 내가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떤 마음으로 집에 나왔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오빠에게 짜증이 잔뜩 났다. 오빠가 뭐라고 하든 그냥 틱틱거렸고, 귀찮은 티를 잔뜩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가 오빠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횐 줄 알았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 그게 오빠와의 마지막 통화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툴툴대지 않았을 텐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줬을 텐데. 아니 따뜻한 말이 아니어도, 그냥 다정하게라도 대답해 줄걸. 추석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학교 앞까지 찾아와 기다렸던 오빠의 마음, 동생이 걱정돼 연락한 오빠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무시해 버렸다. 그 마지막이 끝까지 한스러웠고, 커다란 죄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주려고 했던 오빠와 외면했던 내 일방적인 관계가 떠오르는 날은 언제고 무너져 내렸다. ‘미안함’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떠나간 오빠 앞에서 남겨진 나는 언제나 죄인이었다. 오빠에 대한 죄책감이 수면 위로 올라온 날이면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도, 나는 멀쩡하게 살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조차도 죄스러웠다. 눈물조차도 가증스러웠다. 주기만 하던 오빠에게, 더 이상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사과를 하고 싶어도, 사과할 대상을 잃어버린 죄책감은 언제고 나를 무너뜨렸다. 쉬이 다잡아 지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런 죄책감에 무너져 내릴 땐, 하염없이 울면서 닿지 못할 편지를 썼다.

오빠,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게. 오빠가 용서해 주길 바라는 욕심은 부리지도 않아. 오빠가 용서해 주든, 용서해 주지 않든 언제까지나 오빠를 향해 속죄하면서 살아갈게. 오빠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지만, 내게 남은 삶만큼은 오빠에게 주는 삶을 살아갈게. 오빠가 거기서 걱정하지 않도록, 남아있는 가족들을 지킬게. 오빠가 거기서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아갈게. 무너지더라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게. 그리고 오빠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기억들, 깨달음들을 평생 간직할게. 보고 또 보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는 한, 오빠는 내 마음속에서 평생토록 나와 함께 살아가는 거잖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2021년 1월 26일 편지 중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는 것조차 내게 사치라고 생각하며 다시 펜을 쥐었다. 오빠로 가득 찬 머릿속과 눈물로 가득 찬 시야로 인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책을 펴서 밑줄을 긋고 문제를 풀었다. 인생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으니, 오빠의 사랑이, 오빠와의 추억이 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밀려들어오는 오빠와의 기억이 애틋했다. 그 한없이 낮은 곳마저, 기꺼이 있고 싶었다. 나를 온전히 비워내는 한이 있어도, 그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낮은 곳에서도, 내가 할 일을 해나가면 되는 것일 테니.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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