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무너져도 될 이유보다, 무너지면 안 될 이유가 더 많아서(4)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오빠가 떠난 지 3년이 조금 지난 지금, 아직까지 오빠가 내 삶에 그 어떤 변명도 되지 않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지켜나가고 있어. 오빠의 죽음이 내 삶에서 변명이 아닌 이유가 될 수 있도록. 내 선택에 비겁하게 오빠 핑계를 대지 않도록. 현명하게 살아가려고 하고 있어. 이런 나를 보며, 오빠는 기특해할까? 우리 동생 잘하고 있다, 그렇게 웃어줬으면 좋겠어.
죽음의 문턱에서 택한 공무원 시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혹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22살 겨울, 번아웃이 왔다. 여러 개의 대외활동, 학점에 대한 욕심, 하고 있던 과외. 무언가를 시작하면 ‘적당히’하는 법이 없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하지만, 난 언제나 단거리 주자처럼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끝에는 언제나 타인의 인정이 따라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인정은 희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의 존재가치를 위해 누군가의 인정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언제나 쫓기는 듯한 삶을 살아왔지만, 22살 그 해는 그런 삶에 한계점에 다다른 해였다. 그동안 쌓아두기만 하고 외면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면을 함락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2년째 겪고 있던 공황장애와 우울증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권유했지만,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을 용기도 없었고 주변인들에게 내 상태를 들키기도 싫었다. 건물 옥상을 보면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내가 보였다. 털어 넣는 여러 개의 알약도, 내 삶도,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였다. 2019년 겨울, 죽을 날을 정했다. 유서도 적었다. 이날이 되면, 내 방에 붙어있는 창문에 몸을 던질 거야.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뛰어내리기로 결정한 날 새벽. 창문 턱에 앉아서 까마득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삶에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말처럼. 최선을 다해왔고, 그 최선에 대한 결과는 공허했고, 그려보는 미래는 암울했다. 하지만,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어떤 것 하나에 목숨을 걸 만큼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최선을 다했지만, 내 전부를 걸만큼의 치열함은 아니었다. 시린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창턱에 앉아서 한참을 생각했다. 살고 싶진 않았지만, 죽기에는 아쉬웠다. 언제나 열심히 타오르는 불꽃이었을 뿐, 한 번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맹염(猛焰)이었던 적이 없던 것이 아쉬웠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모든 걸 쏟아내며 불타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쏟아부어 까맣게 재가 된다면, 그땐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목표는 너무 길어도 안 되고, 짧은 기간 내에 혹은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어도 안 됐다. 여태껏 삶 중, 그나마 가장 치열하게 타올랐던 적은 언제였을까. 겨울의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참을 생각했다.
떠오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대입’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공부에만 매진했던 그 시절. 힘든 일도 많았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시기였지만 가장 불타올랐고, 가장 희망에 가득 찬 시간들이었다. 고단한 하루들이었지만, 그 시간들 속의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이 시간들 끝에 찾아올 미래에 가슴 설렜던 날들이었다. 결국 내가 낸 답은 ‘공부’였다.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성공, 혹은 실패. 뚜렷한 결과가 나오는 목표여야 했다. 그러다 문득 ‘공무원 시험’이 떠올랐다. 이 시험이라면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게 나를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1년. 딱 1년만 해보고, 그때도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다면 그때는 정말 뛰어내릴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공시생’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렸다.
신기하게도, ‘공부’라는 단 하나의 목표가 생기니까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점점 좋아졌다. 여전히 삶에 대한 열망은 없었지만, 점차 ‘죽고 싶다’라는 생각은 사라져 갔다. 삶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내게 주어진 사지선다 문제 중 어떤 번호를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지면서 우울증이 점차 좋아졌다. 그렇게 6개월을 공부했고, 시험을 쳤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다. 다시 한번 시험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저 붙기 쉽고, 점수가 낮은 직렬로 골랐던 첫 시험과는 달리, 내가 ‘하고 싶은’ 직렬, 내가 ‘다니고 싶은’ 지역을 선택하고 싶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두 번째로 도전한 시험. 다시 시작한 공부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과정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렇게 자신 있게 재도전하던 중, 아빠와의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지금은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무너진 듯한 기분이었다. 서로를 향해 지울 수 없는 멍에를 남겼던 날, 그 길로 짐을 싸고 집을 나왔다. 새벽에 울면서 전화하는 내게, 친구는 따뜻한 손길을 건네주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그렇게 나는 가족과 연을 끊은 채로, 하숙비도 주지 못하는 하숙생 신세가 되었다.
빨리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독립을 해 가족에게 벗어나야만 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세상에 유일한 희망은 공무원 합격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음에도, 회의감이 밀려왔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싶던 것들이 많던 내 안의 목소리들이 요동쳤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게 공무원으로서의 삶이야?’, ‘공무원으로서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겠어?’. 그런 목소리들에 나는 단호하게 ‘응’이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글쎄. 실은 아닌 것 같아.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기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단 이 비참한 현실을 최대한 빨리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공무원 합격’밖에 없어 보였다. 결국 나를 흔드는 질문들과 타협을 했다. ‘그래, 딱 이번 시험만 하고 그만하자.’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일에 내 소중한 청춘을 낭비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제자리에 서성이다 다짐했다.
딱 1년만 하고,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이 그만하자. 조금의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게, 모든 걸 쏟아내는 1년을 보내자. 일단 시작한 레이스는 마무리한 뒤, 그런 다음 나를 위한 길을 찾아보자.
오빠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던 중 오빠의 죽음을 겪었다. 죽음 앞에 하염없이 흔들리다 다시 꿋꿋하게 스터디 카페 책상 앞에 앉아 내게 물었다. ‘후회 없는 1년을 보내자고 다짐했잖아. 이렇게 갈피 없이 흔들리다가, 결국 자신했던 시험에 떨어지면 너는 오빠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어?’. 차마 자신 있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어’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소중해져 버린 내 청춘을 투자한 시험이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큰소리도 떵떵 쳐놨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는 반드시 합격해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합격할 자신도 있었다. 내가 합격 못하면 누가 하냐고.
그런데, 이렇게 흔들리다가 결국 떨어져 버리면, 내 불합격의 이유를 오빠에게서 찾을 것 같았다. 오빠 일만 아니었으면, 나 합격할 수 있었는데. 무조건 합격한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놨던 주변 사람들에게 불합격을 전할 때, 오빠의 죽음을 이유로 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 능력과 시간을 폄하당하기도 싫었다. 불합격한 뒤 직장을 얻는 게 내 마음처럼 안 풀릴 때, 혹은 가지 못한 공무원의 길에 후회가 남을 때, 언젠간 오빠를 원망할 것 같았다. ‘그때 오빠가 그런 선택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텐데’.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오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주제에, 항상 오빠를 원망해 온 주제에, 마지막까지 오빠 원망을 할 내 모습이. 더는 후회뿐인 원망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시험에 떨어진다면, 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 마음에서 원망의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올 그 생각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서 이뤄내 보인다면 오빠를 원망할 일도 없었다. 그 모든 건 나에게 달린 일이었다.
‘오빠의 죽음이 그 어떤 변명도 되지 않기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무너질 때마다 돼 내었다. 슬픔에 무너지는 것도 내 선택이고, 씩씩하게 견디는 것도 내 선택이었다. 결국엔 내 선택의 결과이면서, 내 선택에 비겁하게 오빠의 죽음을 갖다 붙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빠가 떠나간 후 남겨진 내 수험생활을 단단하게 해 준 8할은 저 문구였다.
‘오빠의 죽음이, 그 어떤 변명도 되지 않기를’
지금 내게 행복은 사치일지도
화목하지는 않던 가족이었다. 물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깊었다. 좋은 개인들이 모여있다고 좋은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개개인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가족 자체는 화목하지 않았다. 유독 ‘불화’에 민감한 나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내게 가정은 전쟁터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남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사람들. 온갖 총성과 포탄음,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오고 가는 전쟁터였다. 가족 개개인을 그렇게 혐오하지 않았지만, 그 개개인들이 모인 가족을 나는, 꽤 많이 혐오했다.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우리 가족은 다짐했다. 이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오빠가 남기고 간 가족의 의미를 간직하며,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자고. 오빠를 떠나보낸 후, 화목하자던 다짐 후 보이는 각자 다른 변화의 속도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여전히 서로를 상처 내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보이는 가족의 모습에 절망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보였다. 그전에는 기대도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빠 일을 겪고 나서는 더 이상 그려니, 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처참했고,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애달프게 울면서 깨달았잖아. 그런데 왜, 왜 여전히 그대로인 거야.
가족들이 언성을 높이며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보고 스터디 카페로 온 날이면 다잡은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같이 힘을 모아도 힘겨운 이 상황에, 서로를 작정하고 무너뜨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가족의 언행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또 비겁하게. 이 상황을, 이 가족을. 여태껏 나는 가족의 일에는 언제나 방관자였다. 방으로 도망쳤고, 밖으로 도망쳤고, 내게로 도망쳤다. 중재하지도, 누구의 편을 들지도, 제재하지도 않고 그저 그 상황에서 도망쳤다. 이번에도 여태껏 그래왔듯,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오빠를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면 그만이라고, 저들의 저 싸움은 나와 관계가 없는 거라고 여기며.
하지만 오빠의 죽음을 겪은 이후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방관하면서 도망치다 오빠를 잃었으니까. 오빠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해줄걸, 작은 도움이라도 줄 걸, 뭐라도 해줄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과 후회를 쏟아냈으니까. 그러니 도망칠 수가 없었다. 서로를 향해 가시를 세우고 있는 가족들 중간에 섰다. 그 중간에서 뾰족하게 세운 가시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가족들을 다독이고 다시 돌아와 공부했다.
이 상황에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다짐했다. 지금 내게, 행복은 사치라고. 무너져있는 가족을 단단하게 붙드는 것, 그들의 슬픔을 안아주는 것, 시험에 합격해 가족에게 좋은 일을 선물해 주는 것.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전까지, 가족의 불화는 내게 이곳에서, 혹은 내 삶에서 도망쳐야 할 이유였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 이후에는 가족의 불화는 내가 바로 서야 할 이유가 됐다. 내가 바로 서서 남아있는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야지. 내가 바로 서서, 시험에 합격을 하며 좋은 일을 만들어줘야지.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일어서야 오빠가 편안하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바로 서서 이 가족의 지지대가 될 수 있다면 내 감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처한 상황이 그 어떤 것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오빠의 죽음을 겪고 다시 이어간 수험생활 동안 내 생각의 중심은, 내가 아닌 오빠였다.
그리고, 내 중심에 오빠가 있었기에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내가 여기 견디는 것으로서, 오빠가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도 찬 서리 같은 마음 어찌 품었나
너는 하오에 부는 바람만큼 온화했는데
우는 날 때 놓고 걸음 어찌 걸었나
하염없이 비 내릴 때 너도 억수처럼 울었나.
떠나가소 아주 가소
지금보다 더 멀리 가소
이내 이런 기다림은
헛된 희망 또 품음이라
나를 두고 가신 임
천리만리 더 멀리 가소
발병이랑 나지 말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행복하소
간 밤에 꾼 꿈결인 듯
전부 다 잊고 행복하소
나를 두고 가신 임아
누구보다 더 행복하소
행복하소
-심규선, <아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