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아홉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2권 87p
미정 누구랑 있으면 (내가)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둘(현아, 기정) …
미정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둘 …
미정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누구랑 있으면 내가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저 대사를 읽으며, 처음에는 굉장히 모순적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나아 보일 수 있는 잘난 사람을 원하면서, 또 그 사람이 아주 잘나진 않아야 한다는 건 무슨 말이람. 일단 눈길을 끈 이 대사에 생각이 잠겼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회적 지위니 뭐니 복잡한 말들을 제쳐두고, 간단히 생각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일단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외모가 예쁘고 잘생긴 사람, 직업이 좋은 사람, 인맥이 넓은 사람 등등.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은 건 사람들의 본능 같다. 살아남으려는 생존 본능. 그런 관점에서 보면 ’ 잘남‘은 다다익선이 아닌가. 잘나면 잘날수록, 내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더 많을 테니까. 그 잘난 사람이 더 잘 나간다면 응원해 줄 일이 아닌가.
문득 ‘질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르고 골라놓고도 전적으로 응원하지 못하고, 나보다 잘나야 하는데 아주 잘나야 하는 이유는 질투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해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 질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 나만큼, 혹은 나보다 사랑하는 존재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보통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높게 날아오를 때 불안함을 느낀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비교’의 잣대가 슬며시 상대방과 내 사이에 들이밀어지니까. 나만 두고 다들 한 발자국씩 나아다 보면 결국 도태되고 말고, 도태는 곧 이 사회에서 생존능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최근에 <질투라는 감옥> 책을 소개하는 포스팅을 읽었는데,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우리는 우리보다 잘난 사람을 향해 질투를 느끼기도 하지만, 나보다 못난 사람한테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200만 원을 벌고 있다고 하면, 400만 원을 버는 사람을 향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에 대한 질투를 느낀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질투의 전형이다. 그러나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을 향해서도 질투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50만 원을 벌다가 모종의 이유로 100만 원을 벌 때. 저 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것에 질투를 느낀다고 한다. 저 사람이 언젠간 내 월급을 따라잡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저 사람은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아서. 그 사람의 ’ 월급‘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고 있는 ’ 성장‘에 대한 질투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질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 오로지 ‘내 성장의 원동력’으로만 작용한다면 건강한 질투겠지만, 우리의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나 감정’을 동반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향한 나의 질투이든, 나를 향한 타인의 질투이든, 달갑지는 않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 감정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행복을 온전히 축하해 주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나는 ’ 잘해야 한다 ‘라는 강박이 꽤나 있는 편이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서, 대학교 때는 맡은 프로젝트에서, 직장생활에서는 업무에서. 내가 해낸 결과물을 통해 내 능력을, 그리고 내 쓸모를 언제나 증명받아야 했다. 나라는 사람의 능력을, 그리고 쓸모를 인정받아야 나라는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잣대가 높아졌다. 어느 순간 자리 잡은 쓸모에 대한 강박은 한 해 두 해가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내려버렸다. 그렇게 나는 자기 효능감은 높지만, 자기 존중감은 0에 수렴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딜 가든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인정받기 위해, 혹은 쪽팔리지 않기 위해 했던 노력의 성과들은 때론 선명한 질투가 되어 날아왔다.
질투의 형태도 다양했다. 잔뜩 날이 선 채 뒤에서 험담을 하고 다니는 악의적인 질투부터 시작해서 나로 인해 본인이 힘들다고 하는 가스라이팅식 질투, 그리고 서서히 거리를 두며 멀어져 가는 질투까지. 잘해야 한다는 내 강박에 누군가는 엄치를 추켜올렸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이도저도 못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저 대사를 발견했다. 잘 나가면 온전히 기뻐해주고, 바닥을 기고 있어도 쪽팔려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 한대도 응원만 할 거라는 저 대사를 공책에 또박또박 적어놓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서, 누군가가 내게 저런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서. 그럼, 이 냉혹한 사회를 버틸 만할 것 같아서. 나조차도 내가 쪽팔릴 때 괜찮다고 손잡아준다면, 뿌듯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나보다 더 좋아해 준다면, 모두가 등을 돌린대도 나와 마주 보고 서있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생각은 돌고 돌다 나에게로 왔다. 내가 나에게 그런 응원을 보내주면 되잖아. 잘한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고, 좋은 일이 생기면 날아갈 듯 기뻐해주고, 힘든 일, 쪽팔린 일을 만나 넘어져있어도 내가 나를 일으켜주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내가 온전히 내편이 되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향한 잣대를 내려놓고,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아홉 번째 해방, 잣대 속에서의 해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