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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23. 2024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여덟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 2권 62쪽, Episode 5


64. 먼 동네 일각(저물녘 혹은 밤)


어느새 산 앞에 멈춰 있는 두 사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좋기만 한 사람이 없을까…라는 느낌.

그렇게 보고 있다가 다시 가며,


구씨  가짜로 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잖아.

미정 (약간 머뭇거리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 있나 싶은)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구씨 …!

미정 … 해봐요, 한번. 아무 말이나.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

순간 구씨가 고개를 홱 돌리고 아, 하면 안 되겠다.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최근, 유다빈 밴드의 <좋지 아니한가> 라이브 무대를 본 적이 있다. 크라잉넛의 <좋지 아니한가>에만 익숙했던지라, 유다빈 밴드가 부르는 이 곡을 처음 들을 때는 낯섦, 그러나 신남. 이 정도의 감정이 다였다. 공연장에 있는 사람들의 텐션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노래. 그 정도. 그러나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것도 친구의 목소리로.


 지금은 서울에 터를 잡았지만 대구가 고향인 친구와 일 때문에 잠시 대구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7년 만에 대구를 방문했다. 나와는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의 현재를 그려가고 있는, 그리고 또 다른 친구의 과거가 묻어있는 이 지역은 왠지 모르게 정다웠고, 익숙했다.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변함없이 사랑스러웠고, 같이 보내는 시간은 대체될 수 없는 행복이었고, 하루이틀밤의 꿈이라는 사실에 여전히 애틋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변함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친구들이 조금은 낯설었다. 언제나 술이 빠질 수 없는 우리들의 만남은 그대로였지만, 누구 한 명은 비틀비틀거리고 누구 한 명은 횡설수설할 정도로는 마셔왔던 지난날들과 다르게, 머무르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맥주 한두 잔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은 낯설었다. 철없고 순수했던, 철이 없어도 괜찮았고 순수해도 별일 없었던 어린 날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정처 없이 흩날려 날아가버렸다. 철이 들고 조금은 더 세상을 알아버린, 철이 들어야만 하고 세상을 알아야만 하는 나이가 도래해 그 속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이십 대 초반, 우리의 어린 날의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랑하는 이들과, 얼큰하게 취해 내 치부가 모두 드러나보인대도 걱정 없이, 안심하고 꺼내보여 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마음 놓고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대구에 오기 전부터 영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몸이 술을 받아주질 않았다. 겨우 맥주 한두 잔에 그치고 말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노래방에 갔다. 노래 취향이 너무도 잘 맞는 친구들이었기에, 이들과 오는 노래방은 언제나 즐거웠다. 내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명곡들이 대방출되는 날이기에 이 친구들과 노래방을 갔다, 하면 적어도 한 달은 거뜬하게 노래로 행복해질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곡들을 발견할까, 기대되는 마음으로 다른 친구들의 선곡을 기다렸다. 한 친구가 이 노래를 들으며 울컥했다고, 요즘 자신의 출근곡이라며 한 자 한 자 노래 제목을 입력하고 예약을 했다. 유다빈밴드의 <좋지 아니한가>였다. 며칠 전에 라이브 무대로 듣고 온 곡이었다. 이게 울컥하는 내용이던가, 그저 신나기만 했던 것 같은데.


 원곡자인 크라잉넛 버전을 들을 때도, 리메이크한 유다빈밴드 버전을 들을 때도 가사를 유심히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신나는 후렴구만 기억에 남을 뿐. 이 친구는 어떤 부분에서 울컥했던 걸까, 워낙 감정선이 비슷한 친구여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노래 가사를 유심히 곱씹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아니한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든, 내가 마음대로 그려갈 수 있는 세상이 좋지 아니한가. 우리의 날들은 지나가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이 있지 않나. 힘든 일이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만, 우리는 같이 있고, 같이 있는 우리는 이렇게 웃지 않는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친구를 한 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친구를 한 번. 그렇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보았다. 내 안 어딘가에서 울컥, 생각이 하나 힘차게 솟아났다. 그래, 이거면 됐지.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얼마나 든든한 일이야. 우리가 함께 있는데. 지금은 비록 물리적인 거리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서로를 향한 마음만은 이어져 있는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데, 다른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곡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가사처럼.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친구들과 헤어지고 다시 나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들과의 시간을 곱씹는데 문득 <나의 해방일지> 대사가 떠올랐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아마 이 대사를 드라마 속에서 들었을 때도, 대본집에서 보았을 때도 난 꽤나 희망적이었던 듯하다. 이 대사에 무척이나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최근에는 이런 류의 말에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기대해 봤자 바뀌는 건 없어. 실망만 남을 뿐이야. 백날 천날 괜찮다를 입에 달고 살았어. 지금 나를 봐. 하나도 안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난 괜찮다고 말을 해. 그렇게 괜찮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아. 괜찮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담이었고, 허탈했다.


 <좋지 아니한가>를 불러준 친구의 마법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을 선물해 준 친구의 마법이었을까. 떨어져 있던 가족도 한 곳에 모여 시간을 함께 나누는 민족의 대명절 추석. 이 추석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을 해버리고 되려 내가 상처를 깊게 받아버려 또 한 번 동굴 속에 숨어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마음 한편에 저 두 가지가 소리도 없이 퍼졌다. 대본집에서 저 대사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오늘 출근길, 출장 가는 길, 퇴근길. 하루종일 <좋지 아니한가>를 한곡 반복 모드로 들었다. 평소에는 지겹기만 했던 것들에, 신경을 건드렸던 것들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아니한가. 그저 바람에 흘러갈 세월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거야. 좋아.라고 단정 짓는 문장이 아니어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니? 스스로 생각해 보게 만드는 문장이어서 좋았다. 나 지금 힘들어. 나 지금 잔뜩 지쳐버렸어. 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이걸 계속해나갈 용기도 없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에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라는 문장이 스며들었다. ‘부질없이 지난날들, 바보같이 지난날들,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지 있지 않나.’ 노래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가사가 처음에는 조용히 티도 안 나게 스며들다가, 결국 뿌리를 내렸다. 그래, 모든 건 주관적인 것이었다. 모두가 좋지 않다고 바라보는 상황에서도, 내가 그걸 좋다고 바라보면, 다른 이에게는 몰라도 일단 나에게는 좋은 것이었다. 모두가 맵다고 혀를 내두르는 음식일지라도 내게는 그다지 맵게 느껴지지 않으면 내게는 ‘보통맛’ 음식일 뿐이었다.


 상황 자체를 바꿀 순 없지만, 그걸 대하는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었다. 그 마음가짐이 바뀌는 순간, 내 마음의 색에 맞춰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왜일까. 괜찮지 않아도 좋을 순 있을 것만 같다.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는 건 이제 지쳐버렸지만, 좋지 아니한가, 물음표를 몇 번 던져보는 건 해볼 만해 보였다.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여덟 번째 해방, 자포자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무가 사라져 간 산길, 주인 없는 바다.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

밤이 오면 싸워왔던 기억.
일기를 쓸만한 노트와 연필이 생기지 않았나. 내 마음대로 그린 세상.

저 푸른 하늘 구름 위에 독수리 높이 날고, 카우보이 세상을 삼키려 하고, 총성은 이어지네.
TV 속에 싸워 이긴 전사, 일기 쓰고 있는 나의 천사.
도화지에 그려질 모습, 그녀가 그려갈 세상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우린 추억해. 부질없이 지난날들, 바보같이 지난날들.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지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우린 추억해. 부질없이 지난 날들, 바보같이 지난날들.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 강물에 넘칠 눈물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이 멋지지 않는가.

-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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