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서 채워온 기록 (1)
오랜만에 본가에 올라갔다. 요새 너무 지쳤던 탓인지, 그냥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의무와 부담이 가득한 이곳을 떠나, 부모님이 있는 본가에 도착하면 조금은 숨퉁이 트일까. 내가 무언가 되지 않아도, 내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쉬고 싶었고, 잔뜩 지쳐버린 마음을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채워야만 5월, 6월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월요일 하루 연가를 내고, 금요일 저녁 기차로 고향에 올라갔다.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부모님의 딸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곳으로 도망쳤다.
쏜살 같이 흐르는 3일을 보내고 다시 내가 사는 곳으로 내려오는 월요일 오후. 잔뜩 허기져서 올라갔던 금요일과 다르게 내려가는 월요일은 한껏 든든해졌다.
몸무게를 재볼 정신도 없이 지내던 요즘이라, 살이 빠진 지도 몰랐다. (아니, 실제로 빠진지도 잘 모르겠지만) 한 달여 만에 본 부모님은 홀쭉해진 얼굴부터 걱정했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 꼬박꼬박 챙겨 먹고,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면서 맛있는 것도 자주 먹고 다니는데. 실은 퇴직하고 나서 대부분 집밥을 먹는 부모님의 끼니가 더 부실할 텐데. 삼일 내내 딸내미 밥 걱정이 먼저였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이거 먹어볼래, 저거 먹어볼래, 삼일 내내 위장에 쉴 틈이 없었다. 세 명이 먹는데 오인분은 될 듯한 푸짐한 양에, 세끼를 먹고 가면 다섯 끼 분량의 식단을 짜놓는 부모님의 푸짐한 마음이 딸내미의 허기졌던 마음을 채워갔다.
오랜만에 딸내미를 본 부모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평소에도 미주알고주알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궁금한 게 잔뜩일 텐데. 얘가 직장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부모님 주변 자식들은 하나둘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는데 얘는 어떤 상황인지, 그렇게 끊어라 끊어라 하던 담배는 끊었는지, 요새는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게 잔뜩일 텐데 묻질 않으셨다. 미리 언질을 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나, 그냥 편히 쉬고만 가고 싶어. 나 요새 사는 게 너무 복잡해서, 본가로 도망쳐온 거야.’ 이렇게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을 본가 지붕 아래로 끌어오지 않으셨다,.
뭐 하나 쉽지 않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뭐 하나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도망쳐온 본가였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던 부모님은, 이번만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당신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셨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시간에 당신들의 이야기로 채워주셨다. 그리고는 그저, 고생한다, 하며 안아주실 뿐이었다.
세상의 관계 방식에 젖어있던 요즘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보여야 했고, 당신 또한 내게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이든 증명해 보여야 했다. 무엇이든 되어야 했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고, 이 정도는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게 내 능력 밖의 일이든, 내 이해 밖의 일이든 결과를 내고 답을 내야만 했다. 그 방식에 잔뜩 지쳐있던 요즘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던 요즘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들만큼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됐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됐다. 나를 증명해보이지 않아도 됐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떤 결과를 내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당신들의 딸인 것 자체로도 귀한 사람이었다. 능력 있는 직원이 아니어도, 똑똑한 사람이 아니어도, 본인의 목표를 잘 이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재테크를 잘해 경제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어도, 무엇도 아니어도 됐다. 그냥, 부모님 딸인 나 자체만으로 되었다.
세속적인 관계 방식을 잠시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지친 마음이 채워져 갔던 시간이었다. 그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부모님의 사랑방식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무언가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그 사람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란 걸 왜 잊고 지냈을까. 이 마음을 기억하며, 다시금 세상에 나아갈 때는 내가 마주하는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