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수를 지켜준 당신에게

아침 습작 첫번째

by 윤슬

1. 띤만 있으면 돼요

어버이날을 맞아, 이번 주 주말에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본가까지는 232km.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주말출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음 주 야근을 무리하게 하더라도 이번 주 주말에는 부모님을 뵈러 가고 싶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 껴있는 주니까. 뵀을 때 짜잔, 하고 드릴 수 있는 선물을 고민했다.


아무렴 어버이날이니까, 조금은 힘이 들어간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아부지 선물은 무선 이어폰 확정. 올해 몇 번 뵀을 때마다 지금 쓰고 있는 무선 이어폰 페어링 문제를 토로하는 아부지가 기억났다. 어무니 선물은 뭐가 좋을까? 고민고민하다가 답을 찾지 못해 카톡을 보냈다. '엄마, 요새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띤만 있으면 돼요.' 띤? 어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인가, 띤이 뭘까.


일단 업무 중이라 다시 뽀모도로를 켰다.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 떠도는 한 단어. 띤. 도통 뭐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엄마가 아닌데. 띤은 또 처음 들어본단 말이지. 삔? 끈? 이번 타임 뽀모도로만 끝나면 바로 찾아봐야지. 메모장 한 귀퉁이에 띤 찾아보기,를 적고 다시 업무에 매진했다. 25분 뽀모도로가 끝나자, 띤이 뭐야?라고 물어보려고 엄마와의 카톡창을 켰다. '딸만 있으면 돼요.' 그 아래로 보내진 메시지. '가벼운 마음으로 와. 딸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먹고 싶은 거 미리 주문받아요.'


어버이날을 맞아 올라가는 건데, 먼 길 오는 딸을 맞이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 지보다는 뭘 해줄 수 있을지가 먼저였다. 어버이날 받을 선물보다는, 자취하느라 부실하게 먹고 다니는 딸내미 먹일 밥이 먼저였다.


당신의 평생을 주었으면서. 이제는 좀 받기만 해도 되련만, 여전히 무엇을 받고 싶은지 보다는 무엇을 줄 수 있는지가 고민인 부모님을 보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번 주 주말에 올라가려면 기차값이 얼마 들고, 선물에는 얼마를 사용할 수 있는지, 다음 주 야근은 얼마나 해야 하는지. 부모님께 드리는 것들에 셈을 하고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나만 있으면 된다는 당신에게, 나를 내어주고 싶다. 당신만큼 기꺼이, 아무런 셈을 하지 않고.


2. 나의 순수를 지켜준 당신에게

최근에서야, 내가 세상물정 모르고 컸구나,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같은 팀원들이랑 커피 타임을 갖다가 '초품아'라는 단어를 들었다.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줄여 '초품아'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파트는 원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품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이 학군을 고민하는 엄마 직원분들을 보며 또 느꼈다. 이사를 할 때 아이 학군도 그렇게 따져야 하는 거였어? 아파트 이사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신용대출, 담보대출, 무슨 대출 무슨 대출. 대출의 금리는 또 뭐고.


초, 중, 고등학교까지 도보로 오분도 안 걸리는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살고 있던 동네에서 교육 환경이 좋고, 학군이 좋았던 동네였다. 학자금은 아부지 직장 성과상여금으로 모조리 내던 부모님 덕에, 학자금 대출이라는 말도 머나먼 나라 이야기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얼마간 작게라도 종잣돈이 있도록 큰 지출 없게 해 준 부모님 덕에, 대출을 생각해 볼 일도 없었다. 꼭 사고 싶은 거, 필요한 거를 말하면 무리해서라도 품에 안겨주던 부모님 덕분에 돈에 욕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돈이 없어서 서러웠던 순간이 없었다. 남들한테 외적인 요건 때문에 무시당했던 순간이 없었다. 그래서 돈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품 안에서 자라던 순간에는, 그런 것 때문에 서러웠던 순간이 없었으니까.


내 타고난 성품이 순수한 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지켜준 순수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스물여덟 살이 됐다는 건, 스물여덟 해 나를 세상 속에서 지켜준 부모님 덕분이었다.


부끄럼 많던 미대생 아가씨는 시장에서 천 원, 이천 원을 흥정하는 철판 두둑한 아줌마가 되었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선생 총각은 타고 다니는 차가 젊은 선생들의 명품 가방보다 싼 구형 중고차를 모는 아저씨가 되었다.


부모님이라고 어디 그러기 쉬웠을까, 부모님이라고 어디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나의 순수는, 부모님의 순수와 자존심을 허물어 높인 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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