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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훈련 시켜주고 돈도 주는 곳

by 윤슬

저번 주 토요일, 가족 여행에서 언니가 물었다.

"올해 하반기에 휴직할 거라더니, 그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휴직. 공무원에 처음 입사했던 2022년부터 꾸준히 다짐하던 생각이었다.


동 행정복지센터 민원대에 있었을 때는 이직을 위한 휴직 결심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의 행정처리를 반려했다. 위임장을 써오지 않은 사람들의 인감 대리 발급을 거절하고, 세대주의 동의를 받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전입신고를 반려하고. 조건도 갖추지 않은 사람의 세대분리를 반려하고. 지침에 따라, 법대로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하는 건데 사람들은 사정 설명을 하며 설득하고, 애원하고, 따지고, 화를 내고. 내향형 90%인 대문자 I인 데다가, 사람 상대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 직업은 도저히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사람에게 시달리면서 산다고? 앞이 깜깜해지는 미래였다.

휴직을 결심했다. 민원팀 팀장님께 (거의 이직 다짐에 가까웠던) 휴직 이야기를 했다. 팀장님은 민원대 뒤의 행정 업무로 자리를 옮겨주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뒤에서 행정업무를 하던 누군가는 나 때문에 민원대로 강제 업무 변경이 되는 게 아닌가. 내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팀장님은 그럼에도 휴직은 말리셨고, 다른 대안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구청 사업부서를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럼, 구청 부서만 한 번 가보고 결정해 볼까.


동장님께 구청에 가서 일을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사람 상대하는 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고. 입맛에 맞는 일만 할 순 없다고 혼을 찔끔 내시곤, 구청 사업 부서로 옮겨주셨다. 타이틀도 화려한 구청장 시책 사업 부서. 민선으로 선출되는 구청장의 공약을 수행하기 위해 개편된 부서였다. 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그걸 실행해 나가는 업무들.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구조화하고 실행해 나가는 업무들은 꽤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구청 사업부서에 오고 나서도 휴직에 대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번에는 글쓰기에 몰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경제국 국서무과의 서무팀이어서 그런지, 일이 너무 많았다. 야근을 밥먹듯이 했고,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민원대에 있었을 때는 하루에 한 편씩은 써 내려갔던 글도, 구청으로 오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편 쓰는 것도 버거웠다. 온전히 글에만 몰두할 때, 내 글쓰기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 하루를 채워갈 때 과연 내 글쓰기는 나의 업의 될 수 있을까. 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업으로 가져갈지, 아니면 그냥 취미 생활로 만족할지 일 년이라도 어릴 때 그 결정을 내보고 싶었다.


나의 휴직 밑바탕에는 언제나 이직이 깔려있었다.




몇 가지 계기로 인해 휴직에 대한 생각이 깔끔하게(뿌리 뽑히지 못했지만 일단은,) 접혔다.


첫 번째는 전 팀장님과의 대화였다. 작년 하반기, 새로운 공유공간 사업으로 인해 전 팀장님과 출장을 많이 다녔다. 전 팀장님은 구청에서도 일을 잘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당연히 공무원이 천직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이대로 승승장구 승진을 하시다가 고위 관리직으로 퇴직을 하고 싶으신 줄 알았다. 하지만 팀장님은 의외의 답변을 하셨다. "아니? 난 내 사업 아이템이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는 거지. 중간에 나가서 난 내 사업할 거야." 어라, 공무원의 끝은 정년퇴직이 아니었어? '공무원스럽게' 일을 하는 팀장님이 아니긴 했다. 항상 혁신적인 걸 추구하는 팀장님이셨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쳤다. 새로운 업무가 떨어졌을 때 팀 아이디어 회의를 자주 하곤 했는데, 팀장님은 직원이 농담으로 던진 우스갯 아이디어 한 꼭지를 잡아 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으로 구조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툭 던진 농담이 하나의 사업으로 뚝딱 만들어졌다. 팀장님은, 공무원 세계를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언제 떠나도 크게 미련이 없어 보였다.


두 번째는 이직에 대한 직원들의 결정이었다. 작년 하반기, 우리 부서로 발령 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의원면직한 분이 있었다. 워낙 일을 잘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삐걱거리는 옆옆팀의 해결사 역할을 기대하며 데려온 직원이었는데, 답이 없는 팀 업무를 보더니 돌연 의원면직을 하셨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전부터 면직에 대한 생각은 있었지만, 인사발령으로 인해 확고한 결심이 들어 면직을 하셨다고 했다. 연차도 꽤 되는 행정직 7급의 돌연 면직에 다들 우려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면직 이후의 삶도 탄탄하게 잘 꾸려나가고 있다고 하셨다.


또 한 명의 직원은 이직을 위해 휴직을 했다 복직했다. 꽤나 친하게 지내던 직원이어서, 복직 이유에 대해 물어봤다. 생각해 보니 어딜 가나 사람을 상대하고, 마음에 안 드는 조직문화가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은 업무라도 해야 했다고. 쉬다 보니 면직에 대한 생각이 줄었다고. 공무원을 떠나도 별다르게 하고 싶은 일이 있지도 않았고, 어차피 행정 업무는 다 비슷비슷할 것 같아서 돌아왔다고 하셨다.


이 셋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직장에 대한 접근 방식이 새로워졌다. 기존에는 '월급을 받으니까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역량을 키우는 곳'이라고 직장에 대한 관점을 바꾸었다. 행정직 공무원을 하다 보면 워낙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방식의 업무를 처리하게 된다. 일자리, 경제, 문화, 관광, 농업 등등 조직도에 주욱 늘어진 다양한 분야들이 있다. 그리고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지침에 따라, 정해진 규정대로 오차 없이 일을 해는 방식이 있고, 새로운 분야에서 지침을 만들어가는 일의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습득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방식을 습득할 수 있다.


문제 해결 능력, 아이디어 구조화 능력, 네트워크 구축 능력, 업무 프로세스 구축 능력. 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필요한 것들이었다. 직장은 이 능력들을 학습할 수 있는 최적의 훈련소였다. 나라는 사람의 역량을 키워주지만 돈까지 주는 곳. 이렇게 정의를 하니 직장에 대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휴직에 대한 마음도 잠잠해졌다. 언제고 짐 싸들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곳.


대통령 선거일, 이 글을 발행하고 오늘도 출근을 하러 가야 한다. 금요일 현충일도 아마 출근을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성장을 포인트로 두고 일을 한다면

오늘도 나는 한 뼘 더 성장할 테고

오늘도 성장시켜주는데 돈까지 주는

손해 없는 장사를 하러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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