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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불면의 밤들

by 윤슬

1.

7월 7일 자로 본청에서 동 행정복지센터로 발령 났다. 연초부터 과장님께, 팀장님께, 팀원들에게 동으로 내려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게 먹혀들어갔나 보다. 본청 부서에서는 조금 더 있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본청에서 승진을 하면 동 행정복지센터로 내려가는 관례가 있었고, 비인간적인 업무 강도를 어찌해 줄 도리가 없었고, 붙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발령 전날까지 12시간 이상 업무를 하다 갔다. 내가 맡은 기간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은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를 해놓고, 바로 업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인수인계서에 정갈하게 담아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갈려나가다 내려온 동 행정복지센터. 발령 첫 주에는 새 부서에서 적응하고, 기존 부서 과장님이 마지막에 부탁하셨던 자료 정리를 마무리하느라 퇴근이 좀 늦었지만 저번 주에 드디어 ‘칼퇴’라는 걸 해봤다. 18시 5분에 근무지 밖으로 벗어나는 기분이란. 약 3개월 만의 칼퇴였다.


2.

본청에서의 막판 3개월은 야근과 주말출근 때문에 내 삶이 거의 없었다. 특히 마지막 6월은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밤 열 시가 훌쩍 넘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할 시간도, 취미 생활을 할 시간도 없었다. 정말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겨우겨우 10분 운동과 아침 한 시간 글쓰기, 밤에 자기 전 플래너 적기만을 근근이 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갈려나가는 동안 몸에서도 이상 반응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멀쩡했던 피부가 저녁에 퇴근할 때쯤엔 고름 찬 여드름이 피부 전체를 뒤덮었고, 호르몬 불균형으로 한 달 내내 고생하기도 했다.


동에 내려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취미생활도 하고, 집도 깨끗하게 가꾸고, 건강도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일곱 시를 넘지 않는 퇴근 시각을 보며,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드디어 여유로워지려나.


3.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계속되는 불면의 밤들. 피곤해서 잠에 들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싫다는 모순적인 생각에 늦은 시간까지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오늘을 떠나보내기 아쉬웠고,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두둥실 떠다녔다. 하나의 생각이 잡히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기본 두 시간은 그렇게 뒤척였다. 실제 수면시간이 서너 시간을 웃돌았다.


왜일까. 본청에 있을 때보다 업무에 대한 부담감도 훨씬 덜했고, 퇴근 이후 가용 시간도 늘어났고,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육체적 피로도도 높았다. 잠을 자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왜일까. 이유를 주욱 늘어놔봤다.


4.

스스로를 풀어주고 다시 쌓아가는 시간의 부재였다.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인사발령 전 미결 업무를 처리하고 인수인계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아침 글쓰기 시간을 포기했고, 퇴근하고 10분가량 하던 운동을 포기했고, 자기 전 플래너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포기했다. 새로운 환경에 좀 적응하자 고생한 스스로를 조금은 쉬게 만들어주자며 포기했다.


나를 쉬게 해 주려고 내려놓았던 것들이었다. 저것들을 내려놓고 시간은 늘어났지만, 제대로 풀어지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도 늘어났다.


풀어주지 못한 마음은 불면으로 이어졌다.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더 중요한 사람이구나.


5.

그래서 어제는 퇴근하고 30분 짧게 러닝을 하고, 돌아와서 건강한 저녁을 챙겨 먹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하고, 플래너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역시나. 잠에 들어야 한다는 노력을 할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적고 브런치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마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절대적인 시간만 많다고 여유가 절로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를 꺼내보고, 돌봐주는 심리적인 여유가 있어야 진정한 여유가 찾아올 수 있었다.


놓치고 있었던 시간들을 차근차근 다시 쌓아가야겠다. 나를 돌보고, 나를 쌓아가는 시간들을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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