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그리움의 크기와 비례한다.

by 파롤
오티모 마시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코지모 형은 매일매일 물푸레나무 위에서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풀밭에서,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자신을 괴롭혀 오던 어떤 것,
그러니까 거리, 결핍감,
저 세상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기다림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기라도 한 듯.

책.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제목이 ‘기다림’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선생님이셔서 1년 동안 미술실 청소를 맡게 되었는데, 함께 하는 친구들이랑 청소 끝나고 소설을 쓰며 소녀감성을 분출(!)하자고 소설잡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 단체로 중2병에 걸린 것이다.


소설은 제목처럼 어떠한 이유 때문에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두 남녀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야기로 대부분을 채우다가 마지막 순간에 딱 만나며 끝났다. 혹시라도 다시 보게 된다면 내 손발이 사라지거나 그 소설을 사라지게 하거나, 아마 둘 다겠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난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요즘 시대엔 오글거린다며 취급도 안 해주는 대사와 설정이겠지만 그때는 참으로 몽글몽글한, 감수성 터지는 순정만화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긴 시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마음이란... 나는 이 소설을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코지모가 다시 오지 않을 오티모 마시모를, 비올라를 기다릴 때, 땅을 바라볼 때, 비아조가 코지모 형을 생각하며 글을 쓸 때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면서.


#그리움

내 사랑은 그리움의 크기와 비례하는데, 이건 중2병에 걸렸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바라볼 때보다 생각할 때 그 마음이 더욱 커지는 이유는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만나는 동안엔 미처 몰랐던 사소한 배려, 대화, 눈빛 같은 것들을 새로이 발견하고 마음속에 새겨 넣는다.


좋았던 순간을 당연한 듯 흘려보내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그리움은 그렇게 커져간다. 층층이 쌓인 공든 사랑의 탑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풍덩 빠지기만을 갈망했던 비올라에게 ‘생각하면서 사랑하면 그 힘이 더 커지는 것’이라 말하던 코지모를 이해했던 건 그 까닭이다.


#거리감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볼테르는 그 대답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코지모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객관성을 얻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다. 편한 삶보다 옳은 삶을 택하겠다는 신념과도 같다. 그 신념의 목적지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 맺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스럽게 만든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보다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마음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고, 우리는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필로그

가족 묘지에는 그를 기억하는 이런 비문이 적힌 비석밖에 없다.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노라’


이탈로 칼비노가 시에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사랑스러운 소설을 쓴 작가답게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곳에서 잠드셨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나는 내가 베네치아 다음으로 좋아했던 여행지다. 4월의 시에나 캄포 광장. 조개 껍데기를 형상화한 곡선미 안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실 때의 기분은 마치! 코지모가 나무 가지 위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닮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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