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트레바리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맥주를 한 캔 사들고 ‘걷술’을 했다. ‘걷술’이란 걸으면서 술을 마신다는 의미다. <아무튼, 술>이라는 책에 나온 말인데, 그날 그 책을 읽었었다. 난 그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걷술을 했었는데, 책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이탈리아 여행 때 걷술을 했던 건 <비포 선라이즈>처럼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상상 때문이었다. 혹은 <로마의 휴일> 같은 꿈같은 하루를 꿈꿨는지도. 그런데 그게 몇 년 뒤 강남에서 펼쳐질 줄은 몰랐다.
“저기요.”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다음은 ‘도를 믿으십니까?’로 이어지겠구나 하는 촉이 살아 숨 쉬었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쳤는데 역삼역 사거리라 신호등에 걸리고 말았다. 하필 빨간불.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해서 조금 짜증이 나 있을 때, 그 사람이 다시 내 시야에 나타났다.
누군가 천천히 옆에 와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예쁜 파마머리를 하고 있는, 소처럼 맑고 예쁜 눈을 가진 남자였다.
“어떻게 사람을 보고 그렇게 도망을 쳐요?”
그 예쁜 눈을 가진 남자는 처음 보는 내게 그렇게 투정을 부렸다.
“얼마나 많이 대시를 받아봤길래.”
내게 그렇게 대시를 많이 해온 사람들은 인상이 좋다며 다가온 도를 믿으십니까의 주인공들이었거늘.
나는 그의 미모와 당당함과 왠지 나를 높여주는 것 같은 말에 홀린 것처럼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신호등에는 마침 초록불이 켜졌다.
“미안해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맥주 한 캔 사줄게요.”
길을 건너면 바로 편의점이 있었다. 나는 걷술을 좀 더 이어가 볼까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내가 마시던 맥주 두 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자기가 마시고 싶은 맥주를 집어 들었다. ‘에델바이스’였다.
내가 사준 답시고 취향도 묻지 않고 골랐구나 싶어 내심 또 미안해졌다. 그리고 결제를 하려고 갔는데 빛의 속도로 내 카드와 그의 카드가 동시에 내밀어졌다. 편의점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남자니까 당연히,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번 미안해졌다. 세 번째였다.
편의점을 나와서 나는 말했다.
“난 강남구청까지 걸어갈 거예요.”
“같이 걸어요.”
“그럼, 가다가 편의점 나오면 내가 사줄게요.”
우린 그렇게 500ml 맥주캔 하나를 들고서 함께 걸었다. 그는 마치 소개팅에 나온 남자처럼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점점 피곤해지는 상태에서 그에게 답을 했는데 티키타카가 잘 맞아서 재미는 있었다.
그는 계속 내게 ‘어디까지 걸을 거야?’라고 물었는데 내가 ‘강남구청’을 ‘광진구청’이라고 잘못 말하는 바람에 그가 빵 터졌다.
순간 놀랐다. 웃음소리가 너무 잘생긴 거다. 얼굴 잘생긴 남자는 많이 봤어도 웃음소리가 잘 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옆을 바라봤는데, 마침 그가 맥주를 마시느라 마스크를 벗었던 순간이었다.
‘우와! 저렇게 잘생겼었구나!’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 눈이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마스크를 벗은 모습까지 저렇게 아름다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나를 이렇게 따라오는 걸 보면 내 마스크에 속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실직고를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 마스크를 써서 그래.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는 쿨하게 답했다.
“얼굴 봤어.”
아, 그도 아마 맥주 마실 때 내 모습을 봤나 보다. 하긴, 그랬으니까 먼저 말을 걸고 다가왔겠지?라고 기뻐하던 순간 그는 내게 말을 건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
“우울해 보이지 않아서.”
친구랑 약속이 깨지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나를 봤는데, 내가 우울해 보이지 않아서 함께 놀고 싶었단다. 보통은 ‘예뻐서, 혹은 내 스타일이어서’라고 말해주지 않나? 내가 거듭 물어봐도 그는 똑같이 말했다.
사실 그 대답도 마음에 들었다. 뻔하지 않아서 흥미롭기도 했고 솔직히 내가 엄청난 미인도 아닌 데다 우울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날 트레바리 모임 때 엄청 많이 웃다가 끝나서, 더 같이 마시지 못하는 아쉬움에 혼자라도 맥주를 마신 게 사실이니까. 그는 그렇게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다정했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
“티키타카가 잘 맞는 사람.”
“우리 이렇게 잘 맞잖아.”
나는 사실 그때 트레바리 모임에서 만난 어떤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어서 솔직하게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질투심 유발하는 거야?”라며 또 투정 어린 말투를 건넸다.
그는 츤데레였다. 나는 이 남자가 참 피곤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선정릉역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 대화를 끝맺기로 했다. 화장실이 너무 급했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하자, 그가 갑자기 근처 빌딩으로 나를 이끌고 갔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서 마스크를 딱 벗더니,
“나 이렇게 생겼어. 자, 번호는?”
이렇게 물으며 이미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육성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우와! 잘생겼다!”
그리고는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다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는 분명히 주변에 여자들이 많아서 나를 힘들게 할 거야. 한두 번 봤나.’
‘좋은 기분으로 끝내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두자.’
나는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너처럼 잘생긴 남자가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잘 가.”
나는 지하철로 향했다. 정말 화장실이 급했다. 그는 계속 나를 따라왔다. 급기야 선정릉역 화장실 앞까지. 이렇게 헤어지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눈빛이었다.
그는 내게 한 번만 안아보자고 두 팔을 벌렸지만 나는 몸을 뒤로 뺏다. 머쓱했을 텐데도 그는 마지막 인사로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 악수만큼은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역삼역 사거리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또한 너무 미안했다.
우리가 함께 걸은 시간, 역삼역 사거리에서 선정릉역까지, 한 30분 정도 되려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미안했던 걸까.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나보고 만나자는데도 나는 왜 앞으로 다가가지 못한 걸까. 왜 미안함을 택했을까.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 후회 앞에서 나는 괜히 술탓을 했다. 모임 때 복분자주를 마셔서 그렇다고. 알코올 5%짜리 맥주밖에 못 마시는 내가 괜히 15%짜리 복분자주를 마셔서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고. 그 후로 3개월 동안 30분 만났던 그를 잊지 못해 복분자주를 원망했다. 그러면서 달달하고 맛있기만 한 그 복분자주를 몇 병이나 비웠던 건지.
시간이 흘러 7월의 어느 날, 역삼역 사거리였다.
“저기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에델바이스남’과 꼭 닮은 예쁜 파마머리를 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분이세요?”
놀란 내가 묻자, 그는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샤프한 얼굴이었던 그와는 달리, 부드러운 잘생김이 묻어있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보내기엔 또 다른 아름다움. 나는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아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설탕이 물에 녹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랑 눈매가 닮았어요?”
그는 머뭇거리던 내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방향을 이끌었다. 눈앞에 그 편의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