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한 나르시스트의 등장

by 파롤


규민은 모델 같은 큰 키에 슬림한 몸매, 큰 눈의 샤프한 얼굴. 중저음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까지도.


규민은 승훈의 라이벌이었다. 둥글둥글한 이중인격자 승훈과 샤프한 나르시스트 규민의 대결은 직장안의 관심포인트였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띠동갑을 넘었으나 권력의 무게는 비슷했다. 오너가 어리고 잘생긴 규민을 더 예뻐했기 때문이다. 승훈의 아부는 규민의 아부 앞에서 빛을 잃었다.


더 흥미로운 건 두 사람 모두, 아니 재동까지 합쳐서 세 남자는 여자직원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을 했다. 규민과 재동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강남 8학군을 나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승훈은 그들보다 더 명문대를 나왔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 심리를 간파했던 영옥과 현지 일행은 우루루 몰려다니며 세 남자의 인기 경쟁에 불을 지폈다. 어느 날은 승훈에게, 어느 날은 규민에게, 어느 날은 재동에게 몰표와 같은 애교와 대화를 건네며 한 남자를 빛나게 해주었다. 매주 왕관을 돌려쓰는 듯한 세 남자.


그녀들은 그들의 경쟁을 이용하여 맛있는 점심과 간식을 얻어먹고, 2시간이 넘는 커피 타임도 보낼 수 있었다. 일의 진행상황과 상관없이 칼퇴도 할 수 있었다.


재희는 그 모습이 흥미로웠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양쪽이 원하는 게 명확하여 성립될 수 있는 관계이니, 모두가 행복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이 세계에서 나는 이방인이겠구나, 라는 직감이 그녀의 뺨을 서늘하게 스쳐갔다.


재희가 그 회사에 입사한 첫 날이었다. 규민은 명함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후에 함께 커피를 마시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재희는 슬쩍 승훈의 눈치를 봤다.


승훈은 앞서 진행한 O.T에서 재희에게 장장 2시간에 걸쳐 규민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놓았기에. 재희는 입사 첫날부터 장시간에 걸쳐 타인을 욕하고 편견을 심어놓는 승훈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직속 상사라는 점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재희는 특유의 일복 덕분에 몰려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규민의 커피 타임을 계속 미뤄야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승훈에게 허락까지 받은 후에야 규민과 재희는 티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승훈 팀장님이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 지 모르지만..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규민의 샤프한 인상에서 유일한 곡선미는 소 같은 눈이었다.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애처로워보이기도 한 그 눈빛에 재희의 마음이 움직이려는 찰라, 규민이 말했다.


“우리 술 한 잔 해요!”


재희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 말이 나오기까지 1시간의 티타임 동안 규민은 자신의 열정과 힘겨움에 대해 토로했다. 이게 만약에 술자리로 이어진다면? 술 마시는 내내 감정쓰레기통이 될 터였다. 더욱이 남직원, 여직원 둘이서 술자리를 한다는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특히 승훈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 직장생활이 지옥이 될 것은 불보듯이 뻔했다.


그리고 또 한명. 영옥의 말이 떠올랐다. 어제 퇴근길에 함께 가자며 다가온 영옥이 재희에게 꺼낸 말이었다.


“저는 규민 과장님이랑 잘 맞는 것 같아요. 같이 전시회 보러 가기로 했어요.”


영옥에게서 ‘내 남자 건드리지 마’라는 섬광같은 눈빛이 보였다.


여러모로 고민한 재희가 규민에게 말했다.


“저 남자친구랑 데이트 해야 되요.”


“매일 해요?”


규민이 약간 짜증난 듯한 표정으로 재희에게 묻자,


“네! 매일 해요!”


재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규민의 슬픈 소 같은 눈이 황소 같은 눈빛으로 돌변했을 때, 승훈에게 연락이 왔다. 회의를 진행할거니 빨리 자리로 복귀하라는 것. 규민이 투덜거리며 돌아가야한다고 말한다.


재희는 안도하며 일어났다. 규민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함께 걸으며 말했다.


“다음에 영옥씨랑 셋이 같이 술 한 잔 해요.”


하, 끈질기네.


“제가 무알콜 맥주밖에 못마셔서..”


재희도 끈질기게 거절했다.


말없이 걷던 두 사람.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규민이 갑자기 재희를 바라보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몇 번이나 외면해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눈빛처럼,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규민의 손을 재희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손을 잡아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내내 거절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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