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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식 Apr 26. 2019

사소함에서

이슬비에 촉촉해진 오후다. 빵집에 들렀다. 뜻 모르는 영어로 쓰인 간판, 거대한 이층 통유리 입구에 움츠러들어 항상 무시하고 지나쳤던 베이커리다. 고급 아파트 후문에서 유기농 빵과 다과를 파는 곳이라 왠지 가격이 비쌀 것 같았다. 부유한 중산층 이상만 드나들 것 같은 장소는 만년 서민인 나에게 누가 막지 않아도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오늘은 비도 오고 다음 일정 사이에 시간도 적어서 일단 들어섰다. 가게 안은 밝은 편백나무 색의 목재들과 붉은 벽돌로 꾸며졌다. 천장에 켜진 백열등이 그들과 합쳐져 따스함을 키웠다. 진열대엔 쿠키와 모닝빵을 비롯한 20여 가지의 빵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4,000원을 넘지 않아 의아했다. 점심때 먹은 쌀국수가 지금 막 위를 지났기에 디저트로 1,500원짜리 크림치즈머핀을 집었다.


카운터에 서서 천장의 메뉴판을 훑었다. 와. 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2,500원에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궁금해진 이곳을 두 눈으로 더듬었다. 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재활센터에서 만든 우리밀 빵을 받아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이더라. 주문을 받은 아르바이트생은 수녀회 재단에 속한 대안고등학교 학생들로 보였다.

1층 카페 가운데 놓인 책상에 한 수녀님이 앉아 있다. 주문을 기다리는 나에게 자리로 가져다 드린다고 말하던 그분이다. 키 155cm 정도의 작은 체구지만 먼지 낀 안경알 너머 눈동자에서 순함과 강함이 상당히 매섭게 전해졌다. 그리고 2층 자리에서 커피와 머핀을 받았다.

별 볼 일 없던 머핀이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손바닥만 한 접시 위에 공손히 놓여 있다. 이 사소함이 가게를 다시 둘러보고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나만 다닐 장소를 발견해서 만족스럽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조차 싱그럽게 보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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