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로 떠날 수 있는 곳은 LA,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세 곳이었다. 가족은 모두 안 가본 곳이지만, 나는 시애틀을 제외한 두 곳은 가 본 터였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한다면 시애틀로 정했겠지만, 경험치를 녹여내며 최선을 선택했다. LA는 이미 다녀온 디즈니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빼면 특별할 곳이 없었다. 시애틀보다 샌프란시스코가 조금 더 볼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의 세 번째 바다 향을 맡았다.
라스베이거스 한식당 주인이 “교민이세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외모까지 이곳에 녹아든 나는 현지 가이드 못지않게 가족을 안내했다. 그런데 아직도 샌프란시스코 얘기만 나오면 ‘앨커트래즈’가 항상 따라 나온다. 예약하지 않아 가기에 번거로웠던 그곳을 우리 여행지에서 뺏기 때문이다. “거긴 자기가 두 번이나 가봐서 안 간 거지?” 사실 그곳 말고 다른 곳도 다 가 본 곳인데. 억울함은 가이드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UC버클리를 포함한 흥미로우면서 교육적인 패키지여행 코스를 완벽하게 재현한 뒤에 세계 일주의 종착점인 하와이로 향했다.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는 건 여행에서도 진리다. 대부분 여행패키지가 하이라이트 여행지를 나중 일정으로 잡는 것도 같은 이유일 거다. 마지막 여행지가 하와이라는 것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우리가 머물 오아후 힐튼 호텔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환영하듯 불꽃놀이가 눈높이에서 펼쳐졌다. 내 마지막 결정에 대한 자신감이 폭죽 터지듯 퍼져나갔다.
당일치기로 간 마우이에서 빌린 빨간 무스탕 오픈카에 처음 올랐을 때도, 간간이 비 오는 하나 로드를 굽이쳐 달릴 때도, 그 길을 이어받아 할레아칼라로 오를 때도 이 여행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될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감 있는 선택이었던 만큼 자신 있는 결과만 남을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할레아칼라 정상에 다다를수록 불안감이 밀려왔다. 비는 왔지만 이내 맑은 하늘을 보여 준 하나 로드의 하늘과 과연 같은 하늘인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갯속으로 숨었다. 오아후에 숙소를 정하고 새벽 비행기로 와서 밤 비행기로 돌아 나는 일정을 선택한 나는 초조해졌다. 유명한 일출은 못 봐도 일몰은 보고 싶었다. 설령 둘 다 못 본다 해도 외계 표면을 촬영할 장소로 원픽을 받는 이곳 지형이라도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는 마우이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안개만 어른거렸다.
그 비싼 비행깃값을 내고 보고 가는 게 안개라는 허탈함은 오아후까지 이어졌다. 날씨가 내 탓은 아니지만, 자신 있는 결정의 결과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때, 우리가 머무는 힐튼 호텔에 붙여진 가성비를 올릴 수 있는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만들어질 힐튼 리조트 설명회에 참석하면 디너쇼가 무료라는 것. 아내를 겨우 설득해 아이들을 수심 낮은 풀장에서 놀게 하고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한국인 스태프가 진행하면서 대화의 장벽 없이 이리저리 넘나들었고, 십 분만 더 그곳에 앉아 있었으면 계약서에 사인까지 할 수준에 다다르자 조용히 아내가 옆구리를 찔렀다. 삼십 분을 예상했던 설명회는 이미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풀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내 손에는 하와이의 소중한 한 시간과 맞바꾼 디너쇼 티켓이 쥐어졌다.
이제야 마우이에서 기울어진 추가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앨커트래즈와 함께 왜 하와이에서 그런 설명이나 듣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리를 지금까지도 들을 줄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았던 우리의 하와이 그리고 세계 일주의 마지막 밤이 완벽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계 일주는 출발한 곳에서 모든 경선을 통과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하지만 여행길에는 단순히 경선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경도가 바뀔 때마다 놀라움, 경이, 황홀, 기쁨, 설렘, 감격, 감동, 평온, 고요함, 낭만, 몽환, 돌발, 혼란, 당혹, 기다림, 낭패, 실수, 실망, 허탈, 피로, 불안, 긴장이란 단어들이 스쳐 갔다. 여행의 성공은 긍정적인 단어를 하나씩 가슴속에 담아 넣는 것과 함께 부정적인 단어를 하나씩 이겨내며 머릿속에서 지워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지금껏 일상을 돌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돌고 있는, 또는 우리가 돌리고 세상이 우리 모두의 집일 수도 있겠다. 그 돌림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돌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바로 답하기 힘들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이제 묻고 싶다. 당신은 세상의 주인공인가? 당신이 돌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리고 당신 옆에 지켜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