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창작과 논문 주제를 찾는 것의 공통점, '나에 대한 이해'
예술 창작과 논문 주제를 찾는 것의 공통점, '나에 대한 이해'.
논문을 써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논문 주제 찾기의 고통'이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시간을 투자한 만큼 분량이 늘어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그나마 덜 고통스럽다. 하지만 논문 주제를 찾을 때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정말 받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준비한 논문 주제가 교수님과의 상담 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미술 창작과 논문 쓰기는 정말 다른 영역의 행위지만, 그럼에도 미술 창작을 하던 경험은 논문 주제를 찾는 나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물론 논문 주제를 찾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님께 얻은 배움이 가장 크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논문을 쓰려면 나의 몫을 수행할 필요가 있고, '나의 몫'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몫이 논문의 주제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논문 주제 찾기는 바로 '나'에게서 출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미술 창작의 경험이 논문 주제를 찾는 데에 깨달음을 준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글쓰기'라는 매체로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미술 창작을 하며 어떤 게 좋은 작업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기준에 대해 자주 고민했었다. 한때 나는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해 나의 작업을 잘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이론을 찾아보기도 했고, 예술을 평가하는 여러 순위들을 살펴보기도 했던 것 같다.
여러 작품을 감상하고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나는 "이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는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작업은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깊게 몰입되었고, 작가에게서 나온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진실했다. 예술 작품의 설득력은 작품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작업들은 이론적인 설명 없이도 내적인 당위성이 있었다. 이 사실을 논문에도 적용해 생각해볼 수 있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미술 창작을 할 때 작업의 소재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선택은 매체였다. 회화,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주제라도 전달되는 방법과 해석되는 방식, 이야기가 심화되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다가 논문을 쓰게 된 나에게, '논문'이라는 것은 또 다른 미술 창작의 매체처럼 느껴졌다. 내가 예술이 아닌 언어를 활용한 글쓰기를 통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처음 논문 주제를 찾던 때에는 페미니즘 미술과 관련한 연구가 대체로 1980~1990년대 분석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대해 분석해야 할 것만 같았다. 논문 상담도 하고 선행 연구도 조사하며 머리를 싸매다가, 어느 순간 논문과 창작을 겹쳐서 생각해 보게 됐다. '좋은 작업'에 대한 기준을 떠올리면서 '나'라는 사람이 '글쓰기'라는 매체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언어라는 매체의 특수함은 '기록'과 '논증'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경험한 시간을 하나씩 돌아보면서, 내가 기록하고 논증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한 끝에 나의 논문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진공의 침묵 속에서도 당신을 믿으며
지난주 연재한 글을 돌아보면서 작업을 하던 나에게 작품을 순수하게 즐겨주는 사람들의 피드백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 당시의 나는 피드백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의 반응이 필요할 만큼 너무나 불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논문을 쓰면서도 많은 불안을 느꼈다. 논문 주제를 6개월째 헤매고 있는 내가, 또 나와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연구를 하기엔 너무 늦게 시작한 데다가 재능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을 꽤 자주 했다. 하지만 내가 미술 창작을 할 때 불안해하면서도 배운 한 가지는, 그 누구의 피드백도 없고 아무런 발전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창작을 하던 나는 그것을 마음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하지만 논문을 쓰면서 나는 지난 시간에 진 빚을 갚듯이, 때로는 지난 시간과 투쟁하듯이 나를 믿어주려 애썼다.
진공이란 개념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어떤 노력과 시도를 해도 거기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칭찬도 질타도 인정도 없는 상태를 상상하며 '진공의 침묵'이라는 말을 썼다. 나와 나의 결과물이 투명해져서 나 말고는 아무도 나의 작업을 평가해 줄 수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본다. 또 노력과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전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믿어주자고 마음을 다지면서, 제자리걸음 같은 논문 주제 찾기의 과정을 돌파해 나갔다.
끈질기게 쫓아가는 집요함
지난날의 작업 노트들을 다시 펼쳐봤다. 작업 노트에는 별별 요상한(?) 이야기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지금으로서는 그때의 의식이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페이지들도 있었다. 다만 노트의 페이지들을 넘기며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논문을 쓰며 마주했던 다종다양한 문제들을 끈질기게 해결하려 따져 묻는 집요함이, 바로 이 작업 노트들을 쓰던 시간에서부터 단련된 것이었음을 말이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작업 노트를 돌아보니 나 역시 한 가지 주제로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하며 짧으면 6개월에서 길면 몇 년 동안 고민했었다.
논문의 주제를 찾는 과정에는 다양한 질문과 문제가 놓여 있다.
"이 주제는 왜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유의미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이 주제가 지적하는 바가 더 뾰족해질 수 있을까?"
"나의 연구 주제 A를 선행 연구 B와 그 이후의 다양한 흐름으로서 C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논문 주제를 찾다가 문제에 봉착하면, 새로운 키워드로 논문의 주제를 뒤엎고 싶은 유혹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다양한 질문과 문제들에 대해 끈질기고 집요하게 풀이를 적어 내려가면서 나에게 맞는 논문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20년 뒤에 네가 어떤 장면에 있었으면 좋겠어?
눈문의 주제 찾기와는 또 별개로, 나의 길을 찾게 해준 데에는 예술가들의 질문이 있었다. 기억하기로, 미래에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냐는 저 질문을 두 번 받았었다. 학부생 때 한 번, 30살쯤 한 번. 학부생 때는 이 질문이 잘 와닿지 않았었다. 그때는 이 질문에 깊게 고민했다기보다는, 마치 놀이를 하듯 떠오르는 것을 꺼내 놓으며 미래를 그렸었다. 30대가 되어 질문을 받았을 때는 무척 오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말하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알라딘의 램프 앞에 서기라도 한 듯이, 말 한마디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고민 끝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과 모여서 토론하고 공부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때 내가 뱉었던 말은 알라딘의 요술램프 이야기에서처럼 단번에 꿈을 이루어 주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 장면을 향해 가도록 이끈 것은 분명하다.
미술 창작과 논문 연구는 무척 다른 행위이지만, 모든 고행이 그렇듯 두 행위는 그 과정과 필요조건이 닮아있다. 결국 미술 창작도 논문 연구도 '나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창작과 연구를 겹쳐보기도 하고, 흩뜨려보기도 하며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구체적인 글을 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