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으로서, 여성 예술인으로서, 연구자로서
개인으로서, 여성 예술인으로서, 연구자로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재해석한다는 것.
과거가 또렷한 언어로 기록되고 그 시간이 하나의 해석으로 규정될 때, 우리는 기존의 인식에 사로잡혀서 거기에도 재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잊어버리게 된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근거 없는 믿음 혹은 지나치게 편향된 믿음을 가지게 했던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수상한 말들은 굳건한 믿음이 되어 마음 한편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곤 했다. 바로 이럴 때 재해석이 필요하다.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재해석한다는 것
논문을 쓰면서 그동안 내가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재해석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음을 눈치챘다. 나는 나의 시간 속에서 경험한 현장의 '페미니즘 미술'과 언어로 기록된 '페미니즘 미술' 사이의 간극을 느끼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여성'이란 다수의 여성에게서 추출된 하나의 특성이나 여성임 그 자체(여성성)를 의미할 수도 있고, 특성이 아닌 나, 너, 그와 같은 각각의 개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니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재해석한다는 것은 여성 다수에 대한 해석이자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의 여성 개인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석사논문 연구에서 '자문화기술지'라는 방법론과 '페미니즘 입장론'이라는 인식 이론을 참고했는데,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경험'이 연구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성으로서 나의 시간과 역사를 돌아보면서 나의 경험을 중요한 근거로 연구에 사용했다. 그리고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재해석한다는 것은, 이번 석사논문의 연구에서 연구 대상이었던 '페미니즘 미술'이나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논문에서 진행했던 연구는, 이러한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재해석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그리고 재해석이 시도되어야 할 수많은 '여성의 시간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앞으로 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은 '나'라는 개인으로서 시도되고, 예술 영역에서 여성 예술인으로서 시도되고, 보다 넓은 학술장에서 연구자로서 시도될 것이다.
나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서, 2개의 전공과 3명의 지도교수님, 4년의 세월을 지나온 나의 방황을 실패가 아닌 과도기로 재해석하려 노력했다. 논문이라는 결과물이 미술사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면, 개인으로서 시도한 재해석은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작지만, 부지런한 재해석의 과정이었다.
재해석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을 재해석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논문을 쓰는 것처럼,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몫인 것이다. 하지만 낯선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참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으로서든, 여성 예술인으로서든, 연구자로서든 우리의 역사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해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과거를 달리 볼 수 있으니, 미래 또한 다르게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강력한 힘이 있을까.
이제 재해석된 믿음에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재해석을 함께하기 이어가기 위해서 연구를 책으로 출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