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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Aug 15. 2023

"침대에선 죄를 짓지 않아"
- 성 혁명과 페미니즘

어느 진지한 뮤지컬 이야기 5

<헤어>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요? 말씀드렸듯 <헤어>는 1960년대 젊은이들이 요구하던 문화적, 정치적 요소가 집약된 작품입니다. 지난 글에서는 히피 문화의 이념적 특징과 실험극 운동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음악이 오케스트라 편성에서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의 록 밴드 편성으로 변했습니다.

히피 문화의 외형적 특징을 반영했습니다.

반권위주의, 자유로운 마약 사용이란 히피 문화의 이념적 특징을 작품 곳곳에 배치했습니다.

반인종주의를 강조했고 반전주의와 평화주의 서사가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성 혁명과 연계된 제2물결 페미니즘의 영향도 뺄 수 없어요.

또 실험극 운동이 브로드웨이에 진입한 사례죠.


앞으로 세 편은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 <헤어>는 관객에게 이야기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제작진은 결말로 걸어가면서 조금 더 큰 담론을 제시했습니다. 성 혁명, 반인종주의, 그리고 반전주의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세상을 빠르게 바꾸고 담론을 종식시키길 꿈꿨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 때문에 <헤어>는 2020년대에도 지켜볼 만한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성 혁명과 연계된 제2물결 페미니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 기준 넘버 리스트. 1막은 "Aquarius"에서 "Air"로 진행하면 된다. 리프라이즈 포함 총 32곡이다.


<헤어>에는 리프라이즈를 제외해도 30개 가까운 넘버가 있는데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곡은 2막의 "Black Boys"와 "White Boys"입니다. 우선 직접 들어 보고, 가사도 살펴볼까요?


오리지널 웨스트엔드 캐스트의 "Black Boys"와 "White Boys".


Black boys are delicious
Chocolate flavored love
Licorice lips like candy
Keep my cocoa handy
I have such a sweet tooth when it comes to love (...)


Once I tried a diet of quiet rest, no sweets
But I went nearly crazy, and I went clearly crazy
Because I really crave for
My chocolate flavored treats (Oh) (...)


Black boys are nutritious
Black boys fill me up
Black boys are so damn yummy
They satisfy my tummy (...)


White boys are so pretty
Skin as smooth as milk
White boys are so pretty
Hair like Chinese silk (...)


Oh oh, white boys are so sexy
Legs so long and lean
I love those sprayed-on trousers
Love the love machine (...)


Give me a strong, a lean
A sexy, a sweet
A pretty, a juicy
White boy


성적 욕망을 공개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백인 사회의 차별이 막강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흑인과 백인이 서로가 어떤 성적 매력이 있는지 노래합니다. 두 관념에 동시에 도전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 넘버는 50년 뒤에도 유효한 정치적 메시지가 소울 음악의 코팅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노래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좌) 1960년 출시된 최초의 경구 피임약 에노비드 (우) 미니스커트 유행을 주도한 모델 트위기/Getty Images


1960년대는 이른바 '성 혁명(Sexual Revolution)'이 일어나면서 몸을 보는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뀐 시대였습니다. <헤어>는 성 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또 미래의 운동을 예견한 뮤지컬이었어요.


과거에도 성 관념이 서구권에서 몇 번 크게 바뀐 적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의 성 혁명은 근본에서 달랐어요. 섹스가 이성애와 결혼에서 분리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트교와 보수주의 성윤리를 가볍게 비웃으며 쾌락을 위해, 이성애/결혼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섹스를 즐기고 자위를 했습니다. 1960년 처음으로 출시된 경구 피임약과. 여성 오르가슴에 걸린 신화를 깨뜨리는 성 행동 연구가 혁명을 지원했습니다. 요컨대 여성이 질 외에도 다른 기관으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연구였죠.


미디어 환경도 바뀌었습니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처럼 외설이라고 명명됐던 작품이 정식으로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플레이보이> 지처럼 포르노그래피 영화와 잡지도 제작되기 시작했어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도 1960년대입니다. 디자이너 메리 퀸트와 모델 트위기는 미니스커트의 화신이 됐습니다. Love가 세상에 가득했어요.


You can lose in the bed,
you can win in bed.
But never, never, never sin in bed!
침대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절대 죄를 짓는 일은 없어!


여성은 성 혁명으로 고무됐습니다. 원래 남성이 갖고 있던 성적 주도권을 가져와서, 스스로의 욕망과 의지로 성적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판단한 거예요. 또 굳이 여성-남성이란 이성애 관계에 갇힐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흐름이 여성에게 유리하게만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보이> 지 같은 매체는 성 혁명의 수혜를 받아 출판될 수 있었지만, 주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성차별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여성은 당대 사회운동의 중추에서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 여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부장제 질서가 그들을 누르고 있다고 판단했어요.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뿌리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좌) 페미니스트 케이트 밀렛. 1970년 <성 정치학>을 출간했다/Getty Images (우) 1970년 미스 월드에서 일어난 항의 시위를 다룬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페미니즘 운동에 새로운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이 시기 일어난 운동을 '제2물결(Second-wave feminism)'이라고 불러요. 1960년대 여성의 움직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면 많은 논문이 필요할 정도로, 운동은 다양한 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현재의 젠더 개념이 만들어졌어요. 생물학에서 보는 성과 실제 사회에서 주어지는 성역할이 분리된 거죠. 거리에서 시위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임신 중지 허용을 주장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가정과 몸에 갇혀서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던 문제들이 세상이 논의되어야 할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정체화한 '여성'이 등장한 겁니다.


<헤어>의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은 사실 페미니즘 운동으로부터 조금 일찍 진행됐습니다. 다만 그 씨앗이 "Black Boys"와 "White Boys"와 "Sodomy"에서 나타나요. 멤버들은 몸을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기존의 상식에 균열이 갔어요. "Sodomy"의 가사를 조금 더 읽어볼까요?


성 해방은 이성애 제도 바깥에 머무르며 핍박받던 성소수자의 각성도 이끌었습니다. <헤어>가 초연한 지 1년 뒤인 1969년, 같은 뉴욕에 있던 스톤월 인이란 술집을 경찰이 단속하자 맞서 싸운 게 계기였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My Conviction"의 대사에서 그 전조를 확인할 수 있어요. "얘들아, 자유롭게 살려무나! 죄책감은 갖지 마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너대로 살거라. 다른 사람은 해치지 말고!(Kids, be free! No guilt. Be whoever you are. Do whatever you want to do, just as long as you don't hurt anybody!)


(좌) 1970년 8월 뉴욕에서 행진하는 여성 (우) "Black Boys"와 "White Boys"를 부르는 오리지널 캐스트/Getty Images


당대 사회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아서, <헤어>의 성별 구성은 과거보다 다채롭다고 할 만했어요. 오리지널 캐스트에서 여성은 10명 이상이 참여하면서 1/3을 넘겼고요. 이름이 있는 등장인물, 즉 작품 안에서 무게가 있는 여성 등장인물은 4명이었어요. 남성은 5명이었으니까 거의 절반을 맞췄던 셈이죠. (2009년 리바이벌에서는 똑같이 4명이었어요.) 캐릭터를 뜯어보면, 디온은 첫 넘버 "Aquarius"에서 전 캐스트를 이끄는 역할을 해요. 실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액티비스트고요, "Air"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지니는 방독면을 쓰고 대기오염을 경고해요.


다음 글에서는 반인종주의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배경화면]

ⓒ Science Museum/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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