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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11. 2024

불현듯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

왜 ‘불현듯’이라는 단어에 단번에 네가 떠올랐을까. 지저분해지는 거 싫어하지만 내가 먹을 새우는 까줬던 사람, 내 커피 취향을 세세히 기억하던 사람. 매일 저녁 빨래하던 것도 생각나네. 입었던 옷은 매일 저녁 세탁기에 돌린다는 게 나에게는 왜 그렇게 귀엽게 다가왔을까. 너와 헤어지고 나는 빨래를 더 자주 하게 됐어. 그 느낌 참 좋더라. 내가 가진 소중한 물건들이 매일 깨끗해지는 그 느낌 말이야. 어쩌면 희미해지는 우리의 기억을 붙잡고 싶었던걸 지도 모르겠다. 


오늘 약속을 마치고 망원동 책 읽는 칵테일바에 갔어. 그곳에서 창작 글쓰기 빌보드차트를 하더라. “‘불현듯’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글을 써주세요.” 나는 그 단어를 보자마자 네가 떠올라버렸어. 벌써 우리가 헤어진 지 1년이나 지났는데.. 나는 사랑에 빠지는데도,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는 사람이라 여전히 아직 거기 살았던 거야. 


너와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 휴가 때 부산여행하는 김에 우리가 만나기로 한 카페로 들어갔어. 1층에서 한 남자가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아..저 남자만 아니게 해 주세요..’ 그분은 정말 내 타입이 아니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내 이상형이길 바랐는지도 몰라. 


성큼 2층으로 올라가서 헤매고 있는데 노트북을 켠 채 집중해서 일하던 네가 벌떡 일어났지. “수빈씨?” 그 목소리에 나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어. 흰 셔츠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향수냄새, 깔끔히 정돈된 모습이 정말 내 이상형이었거든. 내 유튜브 구독자이면서, 책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다 그렇게 친구가 된 우리가 만나는 이 순간이 운명인가 싶기도 했어. 


광주와 부산 사이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인연이 될 거라곤 생각 못했던 것 같아. 그날 안 좋았던 내 컨디션에 넌 내가 친구도 하기 싫어 보였다고 했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어. 장거리 운전에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몸이 좀 안 좋았을 뿐. 그날의 설렘은 아직도 기억날 정도니까. 


“쉽게 흩어져버리는 말보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글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반가워요.”로 시작하는 편지에 다시 한번 널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네 생각을 하며 ‘책 속의 그 술’을 판매하는 이곳에서 고른 술의 책 구절이 참 신기했어.


길을 걷다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마주칩니다. 그런데 둘은 본능적으로 느껴요.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의 사람이라고. 그 느낌을 맛으로 표현했습니다. 달콤한 과일의 풍미가 가득한 술이에요.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은 시절인연이 되었지만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운명이었겠지. 

삶에 스며들었던 네 흔적을 지워내는데 나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 삶이 반짝였던 그 순간에, 그 시간에 함께해 줘서 고마워. 나는 덕분에 앞으로 더 현명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특별했다고 생각했던 연애도 끝이 났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할 때보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 더 많은 걸 배운다. 그래도 과거보다 현재 더 성숙한 내가 됐으니, 이젠 정말로 좋은 사랑을 할 수 있겠지. 아직 과거에 머물러있는 누군가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과거를 후회하느라 현재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아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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