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가을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고, 캠핑이든 불멍이든 하자는 약속을 친구와 했습니다. 친구 이름은 미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경주의 한옥 숙소를 잡았습니다. 1박 2일 일정입니다. 마침 경주에서 할 일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보고, 저녁께 불멍을 합니다. 미미와 나, 우리 둘만 아는 비밀입니다. 집을 비우는 것만으로도 걱정하는 어른이 주변에 많아서 조용히 다녀와야 합니다. 이곳에 썼으니 세상 사람들은 알고, 주변 어른들만 모르는 얘기가 됐습니다. 꼭 비밀 지켜주실 거라 믿습니다.
< 더 글로리 >라는 드라마가 나왔을 때, 집필자인 김은숙 작가는 이런 인터뷰를 합니다. 주인공의 나레이션에 편지의 형식을 빌린 이유를 묻자, 대한민국에서 유서나 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쓴다고 말이지요. 저는 그 말을 참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글은 어쩌다 말이 되지 못한 걸 쓰는 행위고, 유서나 편지는 특정인에게 못다 한 말을 쓰는 행위잖아요. 말로는 다 못해서,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의사소통 방법으로 해내려는 게 상대를 몹시 아끼는 걸로 보입니다. 글은 가장 마음같은 글자를 오랜 시간 선별해야만 하니까요. 말로는 아쉬웠던 진심을 늦게라도 전하고픈 긴 애달픔도 보이고요. 그런 이유로 김은숙 작가가 편지나 유서를 잘 쓰는 건, 누군가를 오래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일 겁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편지를 좋아하는 게 아닐지요. 마음이 글로 치환되기까지 공들였을 시간이 고맙고, 한 글자, 한 글자 내 생각을 빠짐없이 했을 게 고마우니까요. 저도 편지를 좋아합니다. 받기보다 쓰기에 좀 더 능숙하고요. 말보다 글이 편해서 그렇습니다. 존댓말로 얘기하듯 적은 글은 사뭇 편지의 느낌이 납니다. 경주 불멍 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이 마음을 공손하고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한 사람을 겨냥해 꾹꾹 눌러쓴 글은 아니지만 긴 시간 공들인 건 맞습니다.
미미가 압화를 넣어 써준 한시 편지입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불멍이나 바비큐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 숙소는 세 개의 방이 일자로 붙어 있어요. 다다미로 각각 분리되어 있고요. 각 방을 분리한 다다미를 모조리 열면 세 개의 방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큰 거실 형태가 된대요. 널찍한 방에서 과일도 먹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싶어요. 한옥 특성상 문이 많아서 바람도 잘 통하고 대형 스크린도 있어서 영화 시청도 가능하고요. 집에서든, 경주에서든 하는 건 매양 같겠지만 잠깐의 탈출이 마음을 탄탄하게 해 줄 겁니다. 그렇게 믿고 떠나요.
여러분은 어떤 여행이 기억에 남으시나요? 혼자 떠난 여행,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한 여행, 가족 여행, 친구와의 여행도 있으실 텐데요. 저는 몇 해 전, 미미와 민규라는 친구와 함께 떠난 경주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비가 오다, 그쳤다 - 를 반복했습니다. 한옥 독채를 숙소로 정했어요. 처마 밑에 앉아 비가 내리는 마당을 오래 구경했습니다. 마당은 잔디밭이었어요. 흠뻑 젖은 잔디에서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났습니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냄새였어요. 낮 시간 내내 비 오는 풍경과 뒹굴다가, 해가 진 후 경주 시내에 나가 밥을 먹었습니다. 저명한 유적지나 관광 명소를 간 것도 아니고, 일정을 짜고 여기저기 돌아본 것도 아니지만 지금껏 선명한 여행입니다. 몸과 마음이 정돈되고,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면 짧고 소박해도 근사한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몇 해 전 경주 여행의 숙소입니다.
올해도 무던히 지나갑니다. 가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덕에 근교 여행도 떠나봅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직업인 사람은 쉬는 날이면 휴대폰도, 컴퓨터도 다 꺼두고 세상에서 빠져나옵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섭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새로 깨닫고 배우는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말에 보탬이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다 같습니다. 마음의 소리에 집중해야 남에게 더 담백한 말을 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짧은 불멍 여행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만한 거, 누군가는 살아가게 할 말을 또박또박 고민해보겠습니다. 우린 모두 인생이란 의문투성이 여행 중이고 서로가 있어야만 다른 세계를 알 수 있는 미완성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