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엄마 등쌀에 꾸역꾸역 해내던 학습지를 기억하는지. 매주 집으로 오시던 학습지 선생님의 손에는 매끈한 검은색 서류 가방이 있었고, 그 속에 한 동네 사는 아이들의 일주일 치 학습지가 가득이었다. 길고 지루한 학습지 더미 사이에 내 것도 하나. 그땐 어찌나 하기 싫던지. 매일 서너 장씩 정해진 할당량을 권장하는 학습지는 귀신이나 다름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온몸을 비틀어가며 문제를 풀다 보면 그렇게 하기 싫냐는 엄마 잔소리가 들린다. 미루고 미루는 건 특기다. 선생님이 오시기 전날, 엄마 눈을 살살 피해 한꺼번에 몰아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나. 들켰다 하는 날엔 등짝 스매싱이다. 가끔은 몇 장 뜯어서 몰래 숨긴 적도 있다. 근데, 이걸 서른이 돼서 다시 한다고?
아빠는 일본어를 잘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아빠는 일본어의 달인이었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대충 생각에만 그쳤던 게 서른이 되어 꿈틀거릴 줄이야.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외국어 하나는 마음껏 쓰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찾아왔다. 지난한 입시의 동반자였던 영어를 더 배울까, 듣기도 말하기도 어렵지만 멋있는 불어를 배워볼까, 그러던 중 결심했다. 그래! 일본어다! 내게는 공짜로 부릴 수 있는 회화 선생님이 계시잖아. 당장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 아빠, 바쁘나 ”
“ 아니 왜 ”
“ 아빠 내 일본어 배울 건데 좀 가르쳐도. ”
“ 갑자기? ”
이후로도 같은 말을 계속 강조하는 아빠.
아빠 가라사대 외국어는 원서 한 권을 통째로 외우면 된단다. 원서에 나온 문법, 어휘, 맥락을 다 외워버리면 거기서 파생된 수만 가지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히라가나, 가타카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무자비한 교육법 아니야? 아빠는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일단 준비를 해서 덤벼야지. 그래 원서고 나발이고 기초부터 가보자! 그때 빛처럼 머릿속을 빠져나가는 무엇, 바로 학습지였다.
“ 안녕하세요. 혹시 성인도 등록할 수 있나요? ”
“ 네 가능합니다. 어떤 걸 희망하세요? ”
“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데요. ”
시대가 시대인지라 학습지도 발달해 있었다. 집에서 혼자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 선생님이 방문하시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었고, 일본어가 적힌 지면 위에 갖다 대면 그대로 읽어주는 마법 볼펜도 있었다. 옛 생각도 나겠다, 선생님이 오신다면 공부를 미루지는 않겠다 싶어 후자로 선택했다. 선생님이 집으로 오신 날, 반갑게도 알고 지내던 동네 꼬마의 학습지 선생님이 아니던가. 나는 이제 이웃 꼬마와 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운다. 과거 그 선생님처럼 매끈한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들고 오신 선생님.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렸을 적 추억의 물건을 다시 만난 기분으로 즐겁게 공부했다. 어렸을 때와는 180도 다른 상황이다. 꼬박꼬박 숙제를 정해주시니 참으로 마음이 편하다. 딱 요만큼만 하면 오늘 할 공부는 다 했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반가운지. 어른은 맛보기 힘든 기분이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다. 매일 공부하는 게 습관이 된 덕에 일본어가 늘어간다. 학습지 석 달 차, 이제 만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일본에 뚝 하고 떨어져도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이다. 자주 발음을 봐주는 아빠 덕도 크다. 그러나 기초 다지기는 학습지의 공이 전부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구성된 교재답게 기초에 충실했고, 일어라면 나도 어린아이인 셈이니 딱 맞았다.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은 덤이다.
아빠도 고마워 !
앞으로도 쭉 학습지를 할 생각이다. 아빠 말씀에 딱 일본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뭐 어떤가. 공부란 게 하다 보면 대학생도 되어있고 그런 거 아니던가. 학습지로 일본어 마스터가 됐어요! 그런 제목의 글을 쓰는 퍽 우스운 상상도 해본다. 며칠 후면 선생님이 오신다. 어서 숙제해야지. 한 번 밀리면 영영 밀리는 게 학습지다. 바르고 성실한 초등생의 마음으로 오늘도 학습지에 임해본다. 누군가의 잔소리도, 등짝 스매싱도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심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