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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에 무당 된 내 친구에게.

by 이윤우

설하는 무당이다. 서른한 살이다. 설하는 이십 대 초반에 무당이 됐다. 생생한 청춘에 속세를 떠났다. 설하에게는 다섯 살 선녀가 한 명 있다. 설하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선녀에게 별명을 붙여줬다. 그 애 별명은 미미다. 설하는 선녀가 실리면 다섯 살 애처럼 말을 했다. 설하가 다섯 살 애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설하를 미미라고 불렀다.


나는 주로 미미에 관해 글을 쓴다. 오늘은 설하에 관해 쓴다. 설하에게는 무당 설하와 인간 설하가 있다. 무당 설하는 신이 실린 설하, 인간 설하는 그렇지 않은 설하다. 무당 설하는 따뜻하고 배려심 넘친다. 소란하다. 인간 설하는 고요하다. 말수가 적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설하의 이름은 베풀 설에 큰집 하를 썼다. 설하는 이름도 무당 같았다. 베푸는 큰 집. 사람들은 설하에게 사연을 말하러 왔다. 설하는 누구도 허투루 돌려보내지 않았다. 말과 표정에 진심을 꾹꾹 담아 조언했다.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설하는 이름처럼 산다. 베푸는 큰 집이다. 설하는 열일곱에 직접 이름을 바꿨다. 열일곱부터 설하가 됐다. 무슨 생각으로 설하로 바꿨냐 물으면 무당이 되려고 그랬나 보지 – 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아프다. 무당 될 걸 알고 그랬든 아니든 열일곱에 그런 한자가 땡기는 건 서글픈 일이다. 몸은 애고 마음은 어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인간 설하를 모른다. 무당 설하만 안다. 대신할머니가 실려 사자성어를 술술 읊거나, 마음을 관통하는 말을 하거나, 미미가 실려 다섯 살처럼 말하는 설하를 기억한다. 고요하고 말이 없는 인간 설하를 본 적 없다. 인간 설하는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아서 회자 되지 않는다. 회자 되지 않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설하는 죽은 인간이다. 오로지 신의 그릇으로만 존재한다. 설하는 그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이 괜찮기까지, 가슴 아프지 않기까지 설하는 견뎠다. 어려서는 무당 된 인생을 신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바짝 대들다가 신에게 졌다. 무슨 수를 써도 무당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했다. 인간 설하가 죽은 설하라는 사실에도 끄떡없을 만큼 설하는 단단하다. 단단한 그릇이다. 인간사 욕심 없고 속세에 미련없는 걸로 무당 자질을 따지자면 설하는 일등이다. 신이 탐낼 수밖에 없다.


설하에게는 취향이 있다. 그건 설하의 취향이 아니다. 대신할머니의 취향, 미미의 취향, 모시는 신의 취향이다. 설하의 입맛이 자주 변하는 것, 옷 취향이 자주 바뀌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설하는 지난 한 주간 매일 고기를 먹었다. 모시는 신명 중 그런 입맛 가진 이가 한동안 실려 있었다. 금주는 대신할머니가 실려있다. 할머니는 나물과 생선을 좋아한다. 당분간 고기는 거들떠도 안 볼 것이다. 나는 매 끼니를 설하와 먹는다. 설하에게 적응했다. 하루 두 끼, 일주일을 고기만 먹어도 함께 먹을 것이다. 설하는 더 이상 외로우면 안 된다. 설하는 죽은 설하로도 살아가려고 너무 오래 견뎠다. 이제 설하는 반질반질 예쁘게만 살아가도 된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설하 집에는 사람이 잔뜩이다. 원래 무당은 초하루와 보름에 상 차리고 신도를 불러 말씀 나누고 대접하는 게 관례다. 설하에게는 설하가 없으면 곤란한 사람이 많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딸린 식구가 많다. 설하 말에 살거나, 설하 글에 살거나, 설하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병원도 양약도 들지 않는 세상이 어딘가는 있어서 설하는 필요하다. 그래서 설하는 죽은 인간이지만 산 인간이다. 인간 설하는 죽었고 무당 설하는 살았다. 생(生)과 사(死) 사이에 있는 인간이다. 아무도 설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설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서글프다.


나는 설하를 사랑한다. 다른 친구들도 설하를 사랑하고 신도들도 설하를 사랑한다. 설하는 이제 서글프지 않다.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지만 설하가 먼저 이해한 것들이 설하를 사랑하러 온다. 먼저 베풀어야 겨우 사랑받는 인생이지만 베푼 게 많아서 사랑 주러 많이들 올 것이다. 오늘은 설하 점을 내가 쳐주련다. 설하는 영영 행복할 것이다. 사랑받고 살 것이다. 인간 설하는 죽고 무당 설하는 살았어도 무당 설하 죽는 날엔 인간 설하 잘 살았다고 박수받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그게 무당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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