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 많이 하면 천국 가는 건 모르겠지만 나쁜 일 많이 저지르면 지옥 가는 건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이 글은 절대적으로 무속에 몸담은 나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며, 종교적 차원에서 충분히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죄 많이 지은 사람이 어떤 식으로 지옥에 가는지 꿈에서 본 적 있다. 저승과 이승 사이는 삼도천이라는 강이 있는데, 죽은 자들은 버스를 타고 강 위를 달려 건널 때도, 걸어서 건널 때도, 배를 타고 건널 때도 있다. 나는 삼도천을 지나는 버스를 하늘 위에서 보는 입장이었는데 지옥에 다다르기 전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정거장이 있었다. 지옥에 갈 만큼 대단한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사사로운 죄들을 짓고 산 이들이 죄의 무게에 따라 내릴 정거장이 정해졌다.
나는 다른 사람 인생에 기생해 한평생 편하게 놀고먹은 이들이 내릴 정거장에 잠시 들렀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뙤약볕 아래 작물을 길렀다. 열기가 끓어 넘치는 시뻘건 태양 아래 그들은 삐쩍 마른 몸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그곳 문지기의 말이 이곳에서의 노역은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그들이 이승에서 게으른 덕에 다른 사람이 두 배, 세 배로 부지런해야만 했다고, 그들은 다른 사람의 휴식을 훔치고, 여유를 훔쳤으니 열 배, 스무 배로 일해 갚아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그 장면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이 생에서 맡은 바 책임을 미루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기억으로 위 노역장 다음이 바로 지옥이었는데 지옥에 내릴 사람들 얼굴은 귀신 그 자체였다. 사람은 죽어 혼만 저승으로 가는데 이승에서 지은 죄가 혼에 그대로 누적된 탓인지 눈은 새빨갛고 이는 짐승같이 뾰족했다. 공통점은 그들의 표정이 마치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 암흑에 갇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들 스스로 눈이 멀고 귀가 먹게끔 살아왔기 때문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죄를 짓고도 눈을 가리거나, 합리화하며 외면해 왔으므로 그들 스스로 눈과 귀를 쓸모없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욕심이 욕심인 줄 모르는 사람, 알고도 취한 사람, 불륜을 저지르고도 괜찮다며 합리화한 사람, 정의가 무엇인 줄 알면서 외면한 사람,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억울하다는 사람, 나의 정의가 정의인지 감히 의심하지 않은 사람, 전부 본인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취해 눈이 멀고 귀가 먹는 줄 모른 채 살아왔고, 그들의 혼은 그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합리화’ 라는 거짓에 완전히 고립되어 진실된 세상과 영원한 단절을 선언한 채 암흑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이래도 된다고, 딱히 고쳐 잡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죄를 짓고도 그럴만하다고 합리화하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수월히 믿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그 죄가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사람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무엇이 옳고 그른 줄 판단할 수 없고, 죄를 지어도 짓는 줄 모르는 궤에 다다른다는 것을. 그는 살아있어도 산 자가 아니며, 짐승과 다름없고, 죽어서는 본인이 눈 감고 귀 막은 지점을 모조리 깎아버릴 칼날 밭을 수백 년간 걸어 다녀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죄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