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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렸을 때

by 이윤우

단 한 줄도 적지 못할 때가 있다. 생각이 많아서, 쓰는 문장마다 볼품없어서, 갖은 이유가 따라붙지만 단지 그냥 뭐든 말이 안 될 것 같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게임을 하거나 가만히 드러누워만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른 채 마음께 알 수 없는 덩어리만 가득한 기분. 슬픈 것도, 우울한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건 더욱 아니지만, 기분이 썩 좋지도 않은 애매한 불안 말이다. 어디서 오는지, 왜 왔는지도 모르고 나를 잠식하는 것도 아니지만 떠나지도 않는 기름 막 같은 녀석이다.

오늘은 비가 오고 우박이 내렸다. 살면서 우박을 몇 번이나 봤을까- 생각해보면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콩 벌레 같은 얼음이 마구 떨어질 때, 하늘에서 큰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간판이 박살 났다는 뉴스가 생각나 차가 있는 곳까지 부리나케 뛰었다. 애매한 기분은 우박을 보고서부터 생긴 것 같다. 운전석에 앉아 앞 유리로 쏟아지는 얼음들을 보면서 나는 휑뎅그렁한 사막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 얼음이 쏟아지는 소리가 낯설어서였을까, 다니는 사람 하나가 없어서 그랬을까, 바람 소리가 컸기 때문일까. 그때, 마음을 관통한 게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덩어리였다.


한 날의 날씨가 마음을 들썩일 때, 나는 그때가 잦다. 날씨가 좋으면 미움도 원망도 다 용서되고, 날씨가 흐리면 동굴 속에 웅크려야 한다. 비가 오는 눅눅한 날엔 몸을 둥그렇게 말고 글을 써야 하고, 까딱 천둥이라도 치면 그날은 글을 쓰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 사람 마음이란 건 간사하고 유약해서 이깟 날씨 하나에도 휙휙 뒤바뀌고, 미움이나 원망은 더 힘이 없어서 좋은 날씨에 다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십수 년 만에 본 우박 탓에 하루 종일 속이 쓰린 건 내가 유달리 유약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정말 우박이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자꾸 날씨에 진다는 것만 알 것 같다. 축축한 날씨가 일으키는 습한 마음은 날이 개면 괜찮아질 것이고,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는 하늘을 보면 미움도 원망도 다 사그라들 것이다. 불행한 마음은 처음부터 아무 소용도 없었던 게 아닐까. 설령 날씨가 개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다 잊어버릴 마음이잖은가. 원망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모두가 자꾸만, 자꾸만 괜찮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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