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알람을 열 개쯤 맞춰뒀는데 잠결에 알람 소리인 줄 알고 무시했다가 전화를 늦게 받았다. 아랫집에 사는 택시 아저씨의 전화였다. 아저씨는 이 동네에서 거의 첫 번째로 집을 나선다. 한 번은 오늘 같은 전화를 받지 못해서 아저씨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 너무 죄송한 마음에 한 번은 전화로, 한 번은 집에 찾아가 사과드렸다. 값나가는 붉은색 망고를 선물하면서. 부산 사람은 말 한마디에 거칠고 따뜻한 게 다 있다. 아저씨는 양손으로 망고 상자를 받아 들면서, 사과했으면 됐지 이런 건 왜 사 왔냐고 화를 내듯 말했다. 표정은 화가 나 있고, 품속에 망고를 가득 안고, 이러면 내가 더 미안하지-라며 집에 있던 다른 과일을 싸주는 이상한 삼박자. 이 동네 사람들은 다 그렇다. 언젠가부터는 그들이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뻐걱거리고, 거칠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한 편의 시. 덕분에 이곳에서 쓴 글들은 어둡게 시작해도 좋게 끝을 냈다.
10년간 살았던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올 땐 질서를 갖춘 서울의 삶을 버린다는 게 참 겁이 났다. 아침밥을 해 먹고, 방에서 일하고, 장을 보고, 광화문에 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상을 포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거기든 여기든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서대문에 사는 게 무척 자랑스러웠다. 경복궁까지 걸어서 15분, 경회루에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집으로 걸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포기하며 온 부산이었지만 서울에 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것들을 여기서 배웠다. 사람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부대끼며 산다는 게 뭔지 하는 것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세상에는 우울감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울증은 지워지지 않는 멍을 붙잡고 내내 우는 일이다. 그 시간이 계속되면 살아지니까 사는 일이 된다. 관성에 의해 대충 먹고, 대충 씻고, 대충 자게 된다. 대충이 쌓이면 빈틈이 생긴다. 이 빈틈으로 자책, 패배감, 모멸감 그런 게 비집고 들어온다. 친구도 만나고 밥도 잘 챙겨 먹으라는 위로가 다 소용 없어지는 건 사실 우울증의 원인은 남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많은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힘없어 죽겠는데 왜 자꾸 우울하냐고 묻는 건가 싶잖은가. 내가 우울한 수백 가지 이유를 모조리 말할 수 없을뿐더러, 설명할 만한 단어도 마땅찮은데 말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부산에 적응하자마자 우울증이 나았기 때문이다. 퍽 속 깊은 사람들만 있다면 해결될 간단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한때는 슬퍼서 죽을 것만 같다가 막상 안 슬퍼지니까 슬플 때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잔잔한 마음으로 쓴 글이 괜히 어설퍼 보이는 것도 그런 종류다. 행복도 공부가 필요한 일이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 이 행복에 누가 있는지, 그 누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처럼 말이다. 애를 안 쓰고선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이곳에서 우울증을 이겨냈던 건, 우울할 겨를도 없이 사는 사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사는 방식이야 다 다르다만 아픈 것보다 괜찮은 게 낫다는 건 확실하다. 평범한 인생을 위해 노력하는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픈 것도 꾹꾹 참고 애써 괜찮은 척하느라 수고 많이 했다고. 펑펑 울 줄 몰라서 안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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