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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다.

내가 방앗간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5살 때의 이야기다.

by yun

“처음 열었을 때는 잘 되었제.”

“돈 번께 좋았제, 애기들 갈친께 좋다고 허고 했제.”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 ‘오거리 방아간’은 문을 열었다. 방앗간을 열기 전에 조부모님께서는 대인동에서 슈퍼를 운영하셨다고 했다.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자리를 잡으러 이곳에 도달해 방앗간을 차리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이다. 초반에는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미곡장사도 함께였으며 그때는 완성된 떡을 파는 것이 아닌, 재료를 가져다주면 기계를 돌려 만든 떡을 가져다주는 식의 장사를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방앗간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5살 때의 이야기다.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우리 세 가족이 조부모님을 시작해 증조할머니, 고모나 삼촌 등이 함께 사는 여기까지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내게 있어 방앗간의 첫인상은 가게보다는 집에 가까웠다. 그 당시에는 지금 사는 주택이 아닌 방앗간에서 온 식구가 다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제법 대가족의 인원이었고 나름 북적북적한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풍경 중 하나였다.


지금은 아빠가 쓰고 있는 방이 아마 그 당시 안방이었을 거다. 해가 저물어 밤이 깊어질 때면 좁은 방구석에서 조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까지 이불을 펴놓고 나란히 옹기종기 누워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다는 손녀들의 칭얼거림에 할머니께서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시거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직접 ‘구름이~ 구름이~’ 하시며 노래를 불러주시곤 하셨다.


그곳이 마냥 집이 아니라 가게라 여길 수 있었던 것은 아침마다 잠을 깨울 정도로 분주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방앗간 일이 있는 날에 조부모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쌀 분쇄기를 돌려 전날 물에 불린 쌀을 가루로 내 떡을 찌시곤 하셨다. 그 하얀 떡이 무엇으로 변할지 지켜보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저 인절미 쑥떡을 해주면 인절미 떡이 간이 맞어 갖고 맛있다 했어.”


커다란 나무 도마 같은 것을 바닥에 내려놓곤 위에 콩가루를 어느 정도 뿌린 뒤 만들었던 떡 덩어리를 또 그 위로 올려 이리저리 버무리고 치대면 우리가 평소 잘 알던 인절미의 완성이었다. 인절미 자르는 법이 가장 특이했는데 칼이 아닌 솥뚜껑으로 자르시더라. 콩고물 냄새가 고소하게 풍길 때, 쫀득쫀득한 떡 위를 굴렁쇠 굴리듯 굴러가는 솥뚜껑만 봐도 즐거웠었던 것 같다. 동생이랑 그걸 지켜보다 갓 만든 따끈따끈한 인절미를 얻어먹고 그랬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가장 많이 가져다주셨던 떡은 팥시루떡이었다.


절편이나 가래떡을 하시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신 채 이전의 백설기 같은 하얀 시루떡을 제병기 위에 엎어 놓고는 기계의 스위치를 누르면 그 시루떡이 구멍 아래로 빨려 들어가 이내 곧 출구를 통해 따뜻하고 하얀 가래떡으로 나오더라.


보통 이런 가래떡은 두 갈래로 나뉘어 팔렸다. 한 번 뽑힌 가래떡을 다시 제병기 안에 넣고 두 번째로 뽑는다. 그렇게 완성된 가래떡을 대나무 발에 올려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늘어놓고는 식힌 후에 하루 이틀 뒤 절단기 안에 넣어 먹기 좋은 떡국용 떡을 만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중간에 떡이 나오는 출구에다 떡살을 끼우고 그대로 절편을 만들었다. 아이스크림 상자 안에 넣어놓은 절편 위로 참기름을 바르는 것 정도는 어렸던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종종 도와드렸던 것 같다.


지금 사는 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가끔 노는 느낌으로 방앗간 일을 도와드린 적이 많았다. 어렸을 적이라 더 뭐든 재미있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명절에 송편을 빚거나 떡 절단기 앞에서 포대 자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잡고 있거나 등의 일이었다. 정말 자잘한 일이었음에도 즐겁게 했다. 그러다 가끔 아빠가 오토바이 앞자리에 태워서 사직공원을 시작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주면 나랑 동생이랑 둘 다 아주 좋아라 했었다.


할머니 나 심심해, 심심하면 소금 먹어라. 농담 진담 구분을 잘못하던 것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같나 보다. 심심할 때 소금 먹으라는 어른들의 말에 진짜로 굵은 소금을 조금씩 손에 쥐고 하나씩 입 안으로 넣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 밖에도 어른들이 하는 것들을 마루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곤 했었다. 방아를 찧으러 오는 사람, 고추를 갈러 오는 사람, 완성된 떡을 가지러 오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글고 저 교회치도 많이 그 떡도 많이 허고 밥도 찰밥도 많이 쪄주고. ”

“교회치는 걍 몇 말썩 해줬제. 한 가마에서 밥도 쪘제.”


좀 더 자라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사실은 지금도 가끔) 가게에서 종종 용돈벌이식으로 찰밥 도시락을 포장하는 일을 했는데(집 근처 교회에서 단체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이게 진짜 밤이나 새벽에 시작해 몇백 개씩 싸는 일이다 보니 힘들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몇 시간씩이나 목욕탕에서나 쓸 것 같은 낮은 의자에 앉아 반복해 주걱을 들고 일회용 도시락통 안에 뜨거운 밥을 쓸어 담고 있으면 꼭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적은 용돈에 만 원 한 장이라도 보태려고 진짜 열심히 일하다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돌아보니까 생각보다 추억이 많이 남는 공간일 수밖에 없긴 한가 보다. 묘한 반항심에 일 안 한다고 떼쓰면 그냥 넘어가 주셨던 것 같은데 고모들 말 들어보니 예전에 진짜 바빴을 땐 할머님이 정말 무서우셨다고 한다. 지금 많이 누그러지셨다 그랬나. 어느 정도 상상은 가는 것 같다.


“응 인자는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안할라고 생각하고 있은께, 늙었은께.”

“문 닫을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방앗간에서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떡 종류의 개수도 그렇고 잡곡을 팔지 않는 것도 그렇고 기억에 미숫가루도 만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 마지막이었던 건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아직 오거리 방앗간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추석이나 설에는 주문이 들어온다. 그래서 대목에 송편을 만들거나 떡국 떡을 포장하는 것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다. 시간이 남는다면 나랑 동생도 매번 도와드리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방앗간에 대해 이런 진중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기나 했을까. 나만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어서 문을 제대로 닫고 조부모님께서 노후를 즐기셨으면 좋겠다며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잊히는 게 섭섭한 추억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돌아보지 않는다면 잃어버릴 뻔한 것들이었다. 막상 닫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씁쓸함을 느끼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 나는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적다. 당장 방앗간을 직접 물려받을 생각은 없으며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 한편엔 아직도 언젠가 잊힐 기억 같은 게 아닌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 이렇게 돌아볼 수 있다면, 지금은 뭐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것은 할머니를 인터뷰했던 것이 아녔을까 싶다. 어렸을 적과 다르게 대화가 줄어든 지금, 그저 생각 몇 개 여쭤보는 것이 이리 어려운 일이었던가. 질문을 적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횡설수설했던 기억만 남는다.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대상이 가족이었기에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평소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앗간만 해도 퇴근길에 문이 열려있으면 무심하게 셔터를 내리는 것 빼고는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요즘은 나도 모르게 들어가기 전 한 번 간판에 눈길을 주게 되더라.


물론 이런 것은 분명 일시적일 뿐이다. 금방 또 잊어버리고 다시 무심하게 셔터를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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