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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일하기싫어 Sep 03. 2024

아무튼, 맥주

하일하기싫어


"일단 한잔해!"

오늘이란 시간의 셔터를 내리며 영업종료를 알리는 기분 좋은 소리.
일과의 종료 후 또 다른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알림음.

어떠한 시작을 알리는 여러 문구 중에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듣는 순간부터 오전, 오후 온몸을 감싸고 있던 암울하고 쿰쿰한 어두운 기운은 마법 주문을 외운 듯 퇴마 되어 사라진다. 바짝 메말라 뻣뻣한 나무 장작과 같은 어깨와 목 근육은 한 잔, 한잔 기울일 때마다 부드럽게 풀려간다.
삼장법사와 함께한 손오공의 머리띠를 대신 쓰고 있던 마냥 옆통수를 누르던 지끈거리는 두통은 점점 약해져 간다.

온몸을 휘감아 옥죄고 있던 긴장의 똬리가 풀리고 나면 마지막 남은 그날의 스트레스를 한껏 담고 있던 내장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한숨을 "푸우우 후~~." 길게 내뱉어 몸 밖으로 끄집어 버려버린다.

슬라임처럼 녹아내려 의자와 쳐진 몸을 일으켜 맥주캔을 집어 들지만 이미 빈캔이다. 맥주가 비워지는 속도는 그날의 고됨을 알 수 있는 중요 척도가 된다.
냉동고에서 표면을 하얗게 잔뜩 질려버린채 다음 타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던 맥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꺼낸다. 낮은 온도만큼이나 응축된 탄산이 터져 나와 쌓인 피로를 긁어 내려준다.

아까 뱉어놓은 무거운 한숨 덩어리들이 방안을 메운 탓인지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 창문을 반틈 열어본다.
아직 완벽한 어둠이 깔리지 않은 푸르스름한 밤의 초입, 초저녁의 보드랍고 서늘한 실크 바람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물 믿듯이 넘쳐 들어와 방안은 기분 좋은 새로운 공기로 채워지고 스트레스 뭉치들은 바람결을 따라 훌훌 털고 시원하게 날아간다.

그날의 온도, 습도, 바람 세기의 적당함이 맥주의 목 넘김에 감칠맛을 덧대준다. '날씨가 맥주를 부른다.'라는 이상한 명분을 삼아 맥주 한 캔을 더 꺼내온다.
원의 행복이 이런 걸까. 내 행복은 맥주 4캔으로 가능했다. 만 원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없던 믿음이 확신으로 바뀐다. 푸르른 밤이 짙은 어둠으로 무르익어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며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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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곳은 지극히 현실.
이런 소망 따위가 이뤄질 일이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의 압박으로 눈을 마지못해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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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방.

어두운 방안.
들숨날숨소리와 시계 시침 소리가 앙상블을 이루는 방안.
못 참고 입 밖으로 나오는 마음의 선명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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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일하러 가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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