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현 Oct 11. 2022

31-33일 차 : 이끼 낀 지구, 식탁까지 먹어치우기

아침마당,경이로운 한기,파랑,온몸,귤맛,일'몰',장미와빵,겁없는 날

31일 차


아침마당

어제 과외가 밤늦게 끝나서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지만 잘 잤다. 꿈도 불쾌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쉽게 잊었다. 꿈이 흐려지는 동안 더러운 것들도 흘려보내며 빨래를 했다. 흰 양말만 신다가 운동용 회색 양말을 같이 빨아보니 흰 양말은 정말 노동의 보람이 적은 놈이다. 엄마 미안했어. 그래도 앞으로는 회색 양말을 많이 신을 것 같아.


물 뜨러 나갔다가 마당에서 우아하고 날렵한 몸을 가진 검은 대형견에게 일방적인 인사도 받았다. 어찌나 활발한지 사람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른 아침이고 펜션 마당이라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목줄을 잠깐 푸셨던 모양이던데 동물을 무서워하거나 알레르기가 심한 사람과 마주쳤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목줄을 잊지 않고 꼭 해야지, 꼼이를 떠올리며 스스로 다짐했다. 아무튼 나야 큰 개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그저 귀엽고 좋았다. 꼼이가 그립기도 했다.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꼼이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나는 꼼이를 보지만 꼼이는 화면 속의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꼼이가 나를 그리워했으면 하면서도 그냥 이대로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이 교차한다.


오늘 아침은 무언가 평소보다 더 상쾌하고 여유롭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빨래를 할까, 하고 의욕이 넘치는 날. 어떤 것이든 의욕이 넘친다는 건 멋진 일이다.



경이로운 한기


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꽃샘추위라기엔 바람과 꽃이 너무 잘 어우러져 논다. 봄이 와도 바람은 이 해안을 떠나지 않고 꽃들은 그런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다. 살랑살랑 오히려 더 아름답게 춤을 춘다. 그럼에도 겨울의 것도 봄의 것도 아닌 모호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이다. 나는 그렇게 한기가 스미는 느낌이 좋다. 어떤 아픔이나 고통은 즐거울 수도 있음을 알아간다. 내 뼈와 살을 깎아내고 닦아내며 새로워지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그 사실에 집중할 때 그 경이로움에 들뜨게 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당연한 움직임이 내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도 이루어져 왔다는 깨달음이 살아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생각함도 불길한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감각을 기억함으로써, 이런 삶과 저런 삶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괴로움을 죽음을 향하는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수 있겠지.


꼭, 살아남을 것이다. 오늘도 다짐했다.



파랑

엉망으로 솟구친 머리카락을 보면 정지된 사진에서도 바람을 볼 수 있다. 바람이라고만 부르면 부족할 정도로 강한 돌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위이잉 우우우우위이이윙 하는 바람 소리가 집안까지 들어찼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도 집까지 스며든다. 마치 발밑에서 넘실거리던 파도가 집에 찾아온 듯. 사진에 바람을 담을 수 있는 이 마을이 좋다.


오늘 바다 빛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짙다.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다.

그래서 흰 파도가 더욱 힘차고 아름답다.

꼭 바다가 살아 있는 것 같다. 넘실대는 바다의 혓바닥을 밟고 물에 잠긴 길 위에 서고 싶어 진다.

아직은 겁이 많아 가지 못한 길.



32일 차


온몸


왜 온몸으로 부딪히는 문학을 사랑하는지 궁금했다. 왜 문학인들은 부서지고 파열하는 몸을 사랑하는지, 왜 나는 계속해서 여성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동이 터오는 시간에 달리기를 끝내고 아침과 함께 집에 돌아올 때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걸었다. 원래도 익숙하고 안전한 길에서 눈을 감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혹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며 걷기도 했다. 발밑을 살피지 않고 앞을 보지 않고 걸으면 왜인지 좋았다. 비틀거리는 감각도 좋았다.

운동을 하고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젖히고 걸어보니 이유를 알겠더라. 눈을 감으면 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어떤 부위가 꿈틀거리고 어디가 시큰거리는지 알 수가 있었다. 몸이 커다란 덩어리가 아니라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진 복잡한 물질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밉고 무겁고 불편했던 내 몸 구석구석을 조각내어 감각하다 보면 오히려 몸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 든다. 원하는 대로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고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어 부서지는 빛을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몸 안팎을 다 들여다보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어쩌면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는 길이기에 수많은 문학인들은 몸을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뻔히 보이는 것을 지워내야 드러나는 무언가를 감각하고 온몸으로 그들을 지키고 밀고 나가는 삶의 방식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복근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다. 등에 많은 것을 지고 가슴에 많은 것을 품기 위해서. 아직은 비루한 이 몸이 더 오래 달릴 수 있도록.



귤맛2


어제 자주 가는 빵집에 또 들렀었는데 빵이 늦게 나와서 치아바타를 사지 못했다. 대신 궁금해하던 마늘 포카치아를 샀다. 하루 지난 빵을 저렴하게 파는 알뜰빵 칸에 있었는데, 포카치아가 남아 있는 일은 정말 드문데 잘 됐다 싶었다.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오자마자 식욕이 돌아 얼른 포카치아를 데웠다. 건강한 마늘맛 토마토 피자 같은 맛이다. 고로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맛이다.


 쌀식빵도 사 와서 얼려두었다. 양배추찜을 해서 같이 먹을 예정이다. 벌써 군침이 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따뜻한 물로 씻고, 데운 빵을 먹을 수 있음에 오늘도 감사한다. 



이끼 낀 지구

어제까지는 바다였던 바윗길이 다시 드러났다. 아직도 젖어있는 이끼가 선명한 빛으로 살아있다. 이끼는 처음으로 바다 밖으로 나온 식물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태어난 푸른 생명이 육지로 나오고서야 지구는 우리가 아는 '푸른 별'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지구과학은 중학생 때부터 내겐 수면제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지구과학 관련 교양은 낮잠 자는 시간이었다. 커다란 강의실에서 졸고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푹 자고 눈을 뜨면 어느새 마칠 시간이 되어 있던 날들. 4연강이라 힘들었던 그 시절 소중한 낮잠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잠들지 않고 눈을 빛내며 집중하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다큐 보는 날이다. 특히 지구가 가스별에서 산소별이 되고 푸른 생명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건너오는 그 순간, 실제로는 억겁의 시간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찰나처럼 보이는 그 역사적인 사건 발생에 대한 과학자들의 각색은 한 편의 희곡과도 같았다. 경이로운 이야기였다. 어느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서 꼼지락대던 아기의 손가락을 기억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지상에 올라온 움직이는 생명체가 마침내 갈라진 발을 갖게 되었을 때 인간의 다섯 손가락이 태동했다는 그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경이로운 역사를 알게 될수록, 주변에 남아있는 경이를 목격할수록 불안해진다. 그 길었던 창조적 진화의 시간에 비할 수도 없는 아주 짧은 시간만에 지구는 다시 가스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끔찍하게도.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펼쳐진 내 손바닥이 말하는 듯하다.




일'몰'


이 해안에서는 낮 동안의 태양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 마치 바다에서 건져 올려지듯 왼편에서부터 떠오르는 붉은 공은 점차 너무 밝아 맨눈으로는 응시할 수 없는 노란빛을 내며 머리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산호빛으로 물들이며 오른편으로 저물어간다.

일몰이 더 아름답고 일출은 관찰하기가 어려운 동네인데도 그 드문 일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땅의 실루엣 속에 사람들을 파묻고 사진 속에서만큼은 오직 지는 해와 바다, 그리고 검은 바위만을 담는다.


해가 떠오를 때는 동물의 그림자가, 해가 질 때는 자연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래서 일'몰'인지도 모른다. 매일의 일출에 감사하면서 매일의 일몰에는 모든 것을 지우려 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근본은 같은 마음이다.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싶을 때면 일몰을 본다. 그리고 긴 밤을 지나 다시 해가 떠오르면 눈부신 빛무리를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지나친다.




33일 차


장미와 빵, 그리고


3과 8. 두 숫자의 조합은 언제부터인가 다른 의미들을 갖게 되었다. 분단만을 일깨우던 숫자가 이제는 대학원 친구들과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날의 일자, 그리고 여성들의 날로서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있어 개인, 민족,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특별한 숫자 조합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여성의 날을 한반도에서 처음 기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붓을 든 여성들이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토하듯 살아있음을 외친 문인들. 장미도 빵도 자신의 삶조차도 남의 것으로 정해져 있던 시절에 언어와 목소리만은 영원히 자기 것으로 지켜내고 새롭게 피워낸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법에 의해 인정받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던 여성의 날이, 소수의 여성들이 생목으로 지켜 모두에게 전한 이 날이 차별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한 우려 속에서 기념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절박했고 언제나 간절했다. 그러므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외치는 우리는 이제 수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연대를 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내일이 찾아오더라도 어떤 여성의 탓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손에 쥔 장미를 놓지 않으며 빵을 집어던지면서라도 붓과 촛불을 들어 올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장미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세계를 향한 외침을 쓴다면 무엇이 우리를 막을 수 있을까. 한 세기 전부터 이미 그래 왔던 여성들에게는 부족했던 '우리'가 이루어져 있기에.



식탁까지 먹어치우는 욕구와 타오르는 욕망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이 '식탁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굶주려야 방랑이 끝날 것'이라는 하르퓌아의 저주를 받고서 실로 오랜 방랑에 지치고 굶주려 딱딱한 빵 위에 과일 등을 얹어 끼니를 해결하다 식탁까지 먹어치우는 꼴이 되었음을 자조했을 때 마침내 방랑이 끝났음을 깨달았다는 대목이다. 그렇게 아이네이아스는 신에게 버림받은 방랑자이자 저주받을 정도로 잔인한 이방인에서 평화와 동맹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든 영웅으로 거듭난다.


과외용 기출문제집을 냄비받침 삼고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아 비교적 뻣뻣한 빵에 양배추찜을 얹고 허겁지겁 먹다가 문득 아이네이아스가 떠올랐다. 지치고 굶주려 누구를 해칠 여력조차 없는 방랑자처럼, 나는 고기 없는 점심을 식탁채로 먹어치우고 있다. 어릴 때도 다른 영웅들의 방랑기보다 신화 끝자락의 아이네이아스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던 건 그가 수많은 실수를 거쳐 희망조차 잃어버릴 때쯤 마침내 영웅으로 거듭나기 때문이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고 살아남기 위해 영역을 지키려는 하르퓌아 같은 괴물들을 비롯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아이네이아스가 외면한 디도 여왕의 결단은 하르퓌아의 저주만큼이나 강렬하게 아이네이아스의 등을 뜨겁게 달궜으리라. 서사 속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는지, 안타까운 비극으로 여겨지는 디도 여왕의 이야기조차 나에게는 욕망을 향해 모든 것을 불태운 강인한 화신의 이야기로 읽혔다.


매번 배꼽시계에 따라 허기져하며 급하게 밥상을 차리는 나는 요즘 욕구에 매우 충실하다. 그리고 욕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향한 욕망을 찾아나가고 있기도 하다. 나도 방랑의 끝을 직감한 아이네이아스처럼 긴 투병을 넘어 약속된 운명을 만나는 어느 지점에 와있는 걸까? 영웅까진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나의 삶은 분명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보이지만 실은 모두 새롭기만 한 제주도에서, 나는 디도 여왕처럼 욕망을 불태울 대상을 찾고 있다. 그러나 결말은 그와 다를 것이다.



겁 없는 날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매일이 왜 새로우냐고? 나는 아직도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에 익숙해진다는 건 어디든 걸터앉아 하릴없이 주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파도에 조금 닿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내가 파도가 밀려드는 여의 끝에 발을 디디고 미끄러운 이끼 위로 걸어보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 위로 위태롭게 올라도 본다. 그런 일들이 점점 무섭지 않게 되면서 나는 서귀포의 작은 해안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 공간을 믿게 되었다.


붕 뜬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바라만 보던 곳들로 다리를 뻗는 나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새로운 곳에 자꾸 나아가 보고 싶은 오늘은 겁 없는 날인가. 해녀마켓의 담벼락에 올라 아무렇게나 걸터앉았고 발을 대롱대롱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엄마와 통화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러다 고요히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매일매일 이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결코 지겨워지지 않을 텐데.

이전 10화 28-30일 차 : 벽 없는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