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현 Oct 11. 2022

34-37일 차 : 낮은 낮,듣는 수다, 익명의 다정함

악,다시 기원,반가운 지루함,이해불능,대충,식욕의 기온,빙과와 바람명소

34일 차


낮은 낮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그래도 달리러 나갈 생각에 요가를 하고 하루를 계획하다가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는 김이 샜다. 오늘은 여기도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먼지가 좀 가라앉은 후에 나가거나 내일 오전에 달리는 것으로 계획을 바꿔야 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피로감에 누워있다가 그대로 선잠에 들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얕은 잠으로 아침을 보냈다.


몸이 단단해질수록 마음도 단단해지기를 바라는데 잠은 내 마음대로 조절하기가 참 어렵다. 병원에 가서 다짜고짜 저녁 8시부터는 그냥 잠들고 싶어요, 그런 약은 없을까요? 그랬던 적도 있었다. 그러고 받은 게 수면유도제였는데 9시에 먹고 10시 넘으면 잠들 수 있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드는 그런 밤, 온갖 잡생각과 후회와 걱정에 뒤척이다 눈을 뜨면 아침이기만을 바라지 않아도 되는 밤은 축복이다. 운동도 규칙적인 생활도 깊은 잠으로 나를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예전에는 꿈을 꾸는 게 좋았는데 요즘은 꿈이 달갑지 않다. 너무 악몽이 잦다. 약을 끊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좋은 꿈을 조금만 꾸고 깊은 잠에 들던 걱정 없던 나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데 그랬던 날이 언제였더라, 초등학생 때?


그럼에도 바라고 바란다. 먼지가 걷히듯 내 안의 악몽들도 사그라들기를 바란다. 나갈 수 없다면 실내에서라도 운동을 해야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이 낮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창백한 달이 떠있어도 낮은 낮이어야 한다.


35일 차



미세먼지 나쁨. 그래도 달리러 나갔다. 모아둔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고 시원한 물을 떠왔다. 바람이 시원했고 하늘은 산호빛이다. 낮게 드리운 구름 속에서 떠오르는 해는 보다 붉게 타오른다.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은 없다.


민감하고 내성적인 사람에게 박한 이 세상에서 나는 자책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다. 미신을 믿는 법도 배우며 자랐다. 보다 잘 자책하도록. 흐트러진 발걸음조차 문제의 원인처럼 여기도록 말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모두 내 탓 같았다. 나 때문일까? 내가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내가 선택을 잘못해서? 내가 공기가 좋지 않다고 하루 칩거해서? 내가 악몽을 꿔서? 내가 달리지 않아서?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자 온몸에서 더 강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내 탓이냐? 니 탓이지, 안 죽어, 안 망해, 난 살아있어! 나 망한다는 말 진짜 싫어, 내가 살아있는데 뭘 망해! 야! 야!


근래 쌓인 울분이 터져 나왔다. 험하고 말 많은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바닷가에 사니 좋은 점이 추가되었다. 얼마든지 소리 지르고 악을 써도 된다. 아무도 없는 바당길을 달리며 차오른 숨을 뱉어내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쓴 소설 속에서 생리대를 손에 쥐고 길을 걸었던 그 여자처럼, 남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그 작은 몸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어 보이는 커다란 소리로 폭소하는 여자처럼. 조용했던 나에게도 이렇게 타오르는 분노가 있고 열이 있고 의지가 있구나 싶다.


실컷 소리를 지르며 달리고 나니 힘이 넘친다. 분노는 나의 힘. 나는 나를 괴롭히는 세상을 미워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하게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는 가치를 잊은 사랑이 있고 정결한 분노가 있다. 몇 달 간의 스트레스가 좀 해소되었다. 내일이 어떻든 힘이 났다.



다시 기원

실컷 성을 내고 돌아오는 길, 언제 소리를 질러댔냐는 듯 순식간에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바람을 맞으며 바닷가를 걷다가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거센 동네라 바람이 불면 매번 돌탑들이 무너진다. 꽤 크고 평평한 돌들도 섬의 거센 바람에는 장사 없다. 조끼 패딩이 안쪽에 들어찬 바람 때문에 부풀어 올랐다. 낙하산이나 돛처럼 한껏 부풀어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푼 옷을 입고 휘청이며 걸어가자니 온몸의 감각이 선명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바람이 부는 이 해안에 계속해서 돌탑을 쌓는다. 어제 봤던 탑이 사라진 자리에 또 새로운 탑이 생기고 그 탑이 무너진 자리에 또 누군가 돌을 얹는다. 그렇게 반복되고 반복되는 탑 쌓기는 언제나 이 바닷가를 기원의 땅으로 남겨둔다.


매일 해가 뜨고 지고 썰물과 밀물이 반복되는 곳. 그럼에도 매번 내 눈에는 다른 하늘이, 다른 바다가, 다른 세상이 포착된다.



누군가 올려둔, 바람 한 가닥에 바로 무너질 것만 같은 기원의 돌. 저 돌은 얼마나 버틸까? 또 누구의 기원이 그 자리를 대신할까? 바람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 의식을 위해 불어오는 걸까.



듣는 수다


스트레스가 쌓이긴 했는지 간만에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었다. 배달음식을 먹었는데 원래는 잘만 먹던 양의 반을 겨우 먹고 배가 불러서 벌떡 일어나 산책을 시작했다. 오늘도 해녀마켓 담장에 앉았고 바람을 쐬며 유튜브 수다 방송을 들었다. 그 한가로움이 참 좋았다. 지는 해를 등지고 바다를 보며 앉아 있으니 사춘기 때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밤마다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나의 라디오 친구! 아무도 모르는 신인 가수나 인디 음악을 자주 소개해주고 토요일마다 다른 그룹원들을 손님으로 불러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소리 지르고 노는 디제이를 무척 좋아했었다. 그는 날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매일 만나는 친구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다 친구잖아!"라고 시청자들에게 말하는 유튜버들의 말에 왜인지 웃음이 났다. 우리가 그렇게 얼굴도 모른 채 목소리만으로 서로를 친밀하게 대하며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니 기쁘다. 왜 눈을 마주한 사람보다 귀로 만나고 익명의 댓글로 만나는 인연이 더 진실되게 느껴지는지. 어딘가에서 스칠 수도 있는 그들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지금처럼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36일 차


반가운 지루함

요즘 달리기 강도가 세져서 그런가 종아리도 발목도 풀어달라고 쉬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떻게든, 페이스를 낮춰서라도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데 부상을 입으면 말짱 헛것이 되니 조심해야겠다.


부상을 방지하고 근육을 풀어주려고 격일로 달리는데 달리는 날이 아니더라도 눈만 뜨면 달리러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근래 잠드는 시간은 늦어지고 깨는 시간은 그대로라 수면의 질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눈을 뜨면 몸을 풀어주는 습관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물이라도 뜨러 밖으로 나가는 일련의 행동양식이 개운한 아침을 열며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다행이다.


몸을 풀고 창을 열어보니 잔뜩 흐리고 습도가 높은 날이다. 바람이 습기를 머금어 무겁고 가라앉은 것들이 많아서인지 세상은 보다 고요해서 파도 소리가 크게 울린다. 장을 볼 것도 없고 빵집이 문을 열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앉아있는 나는 분명히 바람이 잔뜩 들었다. 외출을 그토록 힘들어했던 내가 이렇게 나가고 싶어 안달인 걸 보면 선생님은 분명 놀라실 텐데. 그리고 칭찬해주실 텐데.


슬슬 찾아오는 지루함이 반갑다. 글쓰기는 아직 모르겠지만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아 전자책을 몇 권 빌렸다.



익명의 다정함


학교 정문과 작은 공원 사이에 사는 소녀상은 겨울만 되면 목도리, 장갑, 모자 같은 방한 용품을 선물 받는다.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전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런 소녀상을 보며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살아남은 분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온기를 나눠 받았고 눈이 쌓이면 털어주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어딜 가나 비슷한가 보다. 이곳의 잠녀상에도 스카프가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풍이 몰아치든 잠녀상은 항상 법환포구 옆 작은 광장에 묵묵히 서 있다. 동화 속 행복한 왕자 동상처럼 언제까지나, 온몸이 벗겨질 때까지도, 누가 허물어버릴 때까지도.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찾아오든 잠녀상은 굳건히 버티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석상이 살아있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하고 아끼고 마음을 쓴다. 단순히 우리의 모습을 본따서 그렇다고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교감이 분명 있다. 항상 거기 있는 존재와 나누는 교감이다.


거의 매일 눈앞을 지나가는 나를 그는 기억할까? 스카프를 감아준 누군가를 기억할까?

그 익명의 다정함을 느끼며 이곳을 지나는 모두가 건강하기를, 그런 소망을 석상에 담아보았다.



이해불능


다정함을 느끼며 미소 짓다가 고개를 딱 돌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전에 달리기를 하면서 밤새 누군가가 벌인 술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용 벤치를 보고 할 말을 잃었었다. 이렇게까지 내버려 두다니. 완벽하진 않아도 큰 쓰레기라도 치우면 좋았을 텐데. 바로 근처에 식당이 있어서 여기 손님을 받고 덜 치운 걸까 잠시 생각했지만 굴러다니는 치킨박스에 고개를 저었다. 횟집에 치킨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다시 오후에 나와보니 누군가가 모든 것을 정리한 후였다. 누구였을까, 누가 책임졌을까, 누가 또 어지러운 광경을 목격했을까. 왜 저지르는 자와 책임지는 자, 그리고 피해 입는 사람은 다 따로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계획한 것과 달리 플로깅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볼 것도 느낄 것도 많다는 핑계로 소홀했다. 잊지는 않아서 조만간, 내일은, 내일은, 해왔다. 그렇게 어지러운 광경을 보고도 지나치기만 했던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




37일 차 


대충


1년 전부터 나는 대충이란 무엇일까를 오래도록 고민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어디까지가 대충이고 어디서부터 적당히이고 또 어느 정도가 최선일까? 수험생인 나에게 엄마는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냐는 물음 앞에서 나는 늘 작아졌다.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하면 최선일까? 더 늦게 잘 수 있는데, 밤을 새워 공부할 수도 있는데, 좀 덜 자고 덜 쉴 수 있는데 하지 않는 나는 요행을 부리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인 걸까?


그래서인지 보름달이나 촛불 앞에서 소원을 빌 때면 항상 내 소원은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였다. 나는 내 노력에 한 번도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더 잘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게으름뱅이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가장 큰 문제는 시작과 끝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끝을 몰랐던 만큼 시작도 몰랐다. 어디까지 올라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 다시 내려가도 된다거나 어디선가 멈춰도 된다는 걸 모른다.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한다. 쉬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진을 빼면서도 정말로 온 힘을 다하는 법도 알지 못한다. 바보 같은 비극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대충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나의 근력과 체력으로는 도저히 달릴 수 없을 것 같은 긴 시간 동안 달리기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고 자세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오직 숨 쉬는 상체, 기계처럼 움직이는 팔, 리듬을 유지하려 애쓰는 발만 존재하는 듯한 순간. 펼쳐진 바다조차 아득해지는 그 어떤 순간. 마치 분홍신을 신은 것처럼 다리가 제멋대로 춤추는 듯한 그 순간. 달릴 때는 매 순간 원치 않아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고꾸라지거나 힘없이 멈춰버리므로.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일은 무척 의미 있다. 더 오래 달릴 내일을 위한 것이자 지금껏 달려온 시간에 대한 약속이기도 한 그런 최선이다. 걷는 속도와 다를 바 없이 느리게 달리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달리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렇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깨달았다. 성취나 결과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계속 달려 나가는 시간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대충이랑 맞지 않는 사람이다.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나는 늘 최고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왔다. 아무도 몰라줄 때조차 달리고 달리고 달리지 못할 때는 걷기라도 했다. 그저 페이스 조절에 서툴렀을 뿐이다. 속도를 조절하거나 쉬어가는 것도 최선일 수 있음을 몰랐다. 이제 격일로 쉬는 일에 익숙해졌고 달리고 걸으며 오래 속도를 유지하는 방법만을, 빨리도 멀리도 아니고 그저 오래 달리는 목표만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식욕의 기온


최고 기온 21도. 아침 기온 16도. 현재 기온 19도.

봄이 왔다고 하기엔 너무 덥다. 창을 활짝 열어두었지만 오늘은 바람도 불지 않아서 갑갑하다. 요리를 했더니 실내 온도가 급상승한다. 반팔에 여름 잠옷 바지를 입고 있으니 정말 여름 같다.


더위가 찾아오니 맛있는 달달구리들이 아른거린다. 이끼 낀 바위에 붉은 해초까지 얹어진 걸 보니 녹차초코케이크가 먹고 싶다. 꽝꽝 얼려서.



빙과와 바람 명소


한때 재밌게 읽었던 학원추리물 소설에서 icecream/Iscream이라는 언어유희가 핵심 요소로 나온 적이 있었다. 어느 아이돌의 노래 가사에도 동일한 언어유희가 사용된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정말로 좋아해서 이 단순한 언어유희가 참 좋았다. 아이스크림의 차가움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저 말장난의 진짜 의미를 알 테지. 지치고 힘든 날 퍼먹는 아이스크림에 맥주 한 캔을 들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질 때, 맥주에서는 보리맛 대신 짠맛이 났고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에는 투명한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보통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간에는 외출을 하지 않는데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2시쯤 집을 나섰다. 다만 밖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자니 볕이 너무 강해 손을 더럽힐 것 같았다. 그래서 가볍게 산책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닷가에 앉아서 먹으면 무척 좋을 것 같아서 다음에 바람 좋은 날에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두 마을의 경계를 향해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내가 걸터앉아 바람을 쐬는 곳. 해 질 녘에 계단 위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저런 곳이 있었다니 하고 부러워하는 명당이다. 그리고 거기서 소리를 지르면 속이 시원해진다. 누군가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답답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원 없이 바람을 쐴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싶다. 소개해주고 싶은 나만의 바람 명소다.

이전 11화 31-33일 차 : 이끼 낀 지구, 식탁까지 먹어치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