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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28-30일 차 : 벽 없는 집

어둠,관찰-살아있음의 증명,뚜벅이,2분 30초,육지사람,다채로운

28일 차


어둠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은 새로운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남들이 말하는 소위 '미라클 모닝' 그런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눈 뜨는 대로 사는 일상에 어떤 유행어나 상투적인 의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의지적인 것도, 부지런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깟 '갓생'이 아니라 한가로운 일상이며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해 뜨면 시작되고 해가 지면 끝날뿐이며 생체시계에 따라 배가 고파서 깨고 배가 고파지기 전에 잔다.

그럼에도 아침이 있는 삶을 넘어 새벽이 있는 삶을 살게 된 이후 만난 변화나 달라진 의미가 있긴 하다. 예전엔 같은 시간에 눈을 떠도 부족한 잠과 피로에 이불속에서 홀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같이 일어나도 개운하게 요가를 하고 하고 싶은 일, 만들고 싶은 일상을 말하면서 아침을 먹고 일어나 준비운동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둠이 두렵지만은 않다. 별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불을 켜지 않고 움직이는 데 익숙해졌고 차단되지 않은 새벽의 빛에 의지해 움직이곤 한다. 그러다 보니 완전한 암흑이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도시는 너무 밝아서 어둠이 두려웠는데 여기서는 해가 지면 그 자리를 채우는 어둠이나 희미한 달빛, 별빛이 너무나 당연해 두렵지가 않다. 어쩌면 어둠은 인공적인 빛 없이 마주할 때 진짜 빛과 함께 그 따스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

모두가 잠든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유롭게 막춤을 추다가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달리러 나간다.



관찰-살아있음의 증명


매일매일 내 모습을 살피고 사진으로 남기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나는 늘 내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한강의 소설 『검은 사슴』에서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온 인물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 견딜 수 없었던 건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만들어진 인적사항으로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던 그가 거짓된 삶과 증명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견디지 못해 모든 걸 벗어던지고 나체로 교차로를 달리던 장면이 마음속 깊이 박혀왔다. 아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이제 네 차례야.' 하는 목소리와 함께 혼잡한 교차로로 등을 떠밀리는 환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계,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런 세계가 두려워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 살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 멈춰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차라리 다 멈추고 내 손으로 모든 걸 지워버리면 덜 억울할 것도 같았다. 포기할 용기가 나아갈 용기보다 더 커지는 그런 두렵고 무기력한 순간을 아프게 마주했었다.

물론 이젠 아니다. 하나하나 남기려고 한다. 한강의 『검은 사슴』에서 나를 울린 어떤 인물은 매일 하루를 마감하면서 일기를 썼다. 고심 끝에 고른 가장 적확하고 간결하며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기록하려고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준다는 듯이 절박하게 썼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내 하루하루를, 나의 모습을 여러 가지 언어로 남기고 싶어 졌고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과 달리 나는 더는 슬프지 않다. 여전히 내 존재를,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고 그래야만 숨 쉴 수 있을 것만 같지만 그 욕구가 짐이 아니라 내가 읽고 쓰고 생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없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던 때와는 전혀 달라졌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형태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예전과 달리 오늘의 나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먼저 나를 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나의 시선에 포착된 내 모습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면 뿌듯해진다. 특별히 보정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담기만 해도 스스로에게는 충분히 좋은 사진을 건질 수도 있게 되기도 했다. 그 사실이 그렇게 기쁘다.


타인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시선을 더 많이 의식하고 있는 오늘의 몸은 평소보다 더 가뿐했다. 모레는 더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29일 차


뚜벅이


사전투표를 하러 왕복 100분을 걸어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대륜동에 다녀왔다. 가는 버스가 없는 건 아닌데 어차피 정류장까지 15분 걸어야 하고 내려서 또 10분 걸어야 해서 그냥 운동 겸 걸어 다니곤 한다. 동마다 두세 개의 사전투표소가 있던 도시, 어디서든 눈에 띄는 곳에서 투표를 할 수 있었던 도시, 그런 서울의 조건이 당연하지 않음을 조금씩 배운다. 사전투표소가 많지도 않은데 사전투표를 하는 인원이 몰리지 않는다. 투표소가 그렇게 많아도 관외 투표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던 서울의 풍경과 너무 달랐다.

오랜만에 멀리 나간 김에 그쪽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왔다. 그래도, 귀찮고 다리가 아프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한 나라에서 무의미한 전쟁으로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는 이 세계에서 내 몸과 시간으로 자원을 아주 조금이라도 대체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닌지. 그런 생각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과일을 고르면서도 제주나 서귀포산 과일인지 확인했다. 적어도 국내산, 정 안 되면 가까운 나라에서 수입된 과일이어야 한다고 기준을 세웠다. 아침에 소화가 빠른 바나나가 좋다고 해서 바나나를 살 생각으로 갔는데 먼 곳에서 수입된 과일이라 살지 말지 아주 오래 고민했다. 사오고서 후회했으니 다음번엔 사지 않을 생각이다.

동물복지계란을 사려고 하니 그 많은 상품 속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로 줄었다. 1인 가구에게는 다소 많은 양이라 열심히 먹겠다는 다짐을 하며 사야 했지만 이걸 사러 동네 마트가 아닌 큰 마트에 왔으니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카트에 계란을 담았다. 벼르고 벼르던 다진 마늘도 샀다. 마늘이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해지는 게 나는 분명 한국인이구나.



무리하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만 담은 짐을 들고 돌아가는 길, 미리 눈여겨봐 둔 버스정류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대문인 정낭의 생김새를 따온 의자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벽 없는 집


해안산책로를 거쳐 산책하듯 시내로 향했던 터라, 바닷가에서 아침 식사 중인 듯한 새 한 마리를 보았다. 하얀 몸집에 유난히 길고 가느다란 다리, 끝부분이 짙은 회색 날개. 저 큰 새는 항상 같은 자리에 혼자 있다. 물론 매번 같은 새가 맞는지 알 길이 없지만 우리가 생활범위 내에서 주로 살아가듯 새에게도 자기만의 범위가 있지 않을까? 긴 다리를 뻗으며 걷고 마찬가지로 긴 목을 빼고 넣고 하는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아하다.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를 때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 새는 왜가리인 듯하다. 어느 날 성내천 근처에서 매우 닮은 새를 마주치곤 찾아보았다.


오늘은 대기 상태가 다소 좋지 않은 날이라 산책을 마치고는 씻고 집안에 틀어박혔다. 이렇게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면 나는 창을 굳게 닫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려오는 목과 말라붙거나 콧물 범벅이 되는 코에 따뜻한 물과 습기를 공급하며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오늘 만난 그 새처럼 저 바깥이 집인 바다새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미세먼지를 조금이라도 피할 닫힌 집이 없는데.

추위나 더위, 굶주림, 갈증 같은 자연의 섭리는 내 시선에서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 저들이 경험하는 추위, 더위, 굶주림, 갈증, 그리고 질병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여전히 내가 판단할 영역은 아니지만 미세먼지나 기상이변 같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어져 있다. 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런 위기를 함께 겪고 있고 인간보다 더 취약하다. 그러므로 다른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주 이기적인 침입자들에게 너무나 너그러운 저들을, 손 놓고 잃어가고 싶지 않다.




30일 차


2분 30초


오늘도 좀 기분 나쁜 꿈을 꿨지만 잠자리가 사나울 정도의 악몽은 아니었다. 그래도 수면시간은 늘어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무척 배고파하며 깼다. 간혹 처방약을 감량할 때 금단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딱히 그 정도의 어려움은 없이 잘 헤쳐나가고 있다.


기분도 좋고 새벽 공기가 맑길래 신나서 뛰러 나갔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체력이 달리는지를. 지금껏 악쓰듯이라도 노래를 불러대며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딱 거기까지는 할만했던 것뿐이다. 달리기는 만만하지 않아, 노래는 무슨. 런데이 어플에서 제공하는 8주 코스에서 3분 정도 구간이 대다수가 호소하는 고비라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2분 30초씩 끊어 뛰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달리기 때는 거의 멈추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기어가듯 달려야 했다. 페이스 관리고 뭐고 미쳤구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2분 30초가 달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인데, 그 달리기 사이의 걷기 구간에서 2분은 왜 그렇게 짧은지? 심호흡을 거듭하다가 억 소리를 내며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오늘 바람도 세서 맞바람 탓에 페이스를 높일 수조차 없고 몸이 흔들렸다. 휴식이나 다름없는 걷기 구간 2분보다 더 긴 시간을 계속 달려야 하는데 앞으로 버틸 수 있을까? 이게 하면 느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 되면 오늘 코스를 반복해야 하겠지만.

돌아와 보니 맑았던 공기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는지 어느새 미세먼지 농도가 또 최악을 찍었다. 그래도 서울에서처럼 공기에서 탁하고 녹슨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법환포구보다 배가 많이 다니는 듯한 강정포구 쪽이 기준 측정소라 서귀포 치고는 오염도가 심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선박 매연이 생각보다 심하다는데, 무엇 하나 우리는 해 끼치지 않는 일이 없구나. 반대쪽 측정소는 외돌개 방면으로 비교적 관광지 부근인 것 같던데 거긴 보통 수준이니, 우리 동네도 그곳처럼 좀 덜하다고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자욱한 안개 대신 구름이 왔으니까.



흰머리


미세먼지가 싫어서 집안에 있게 된 김에 방 정리를 좀 했다. 내 방에서 가장 부산스러운 공간은 사용하지 않는 티브이 아래에 설치된 작은 선반 쪽이다.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정리를 해도 어수선하다. 바닥에도 무릎보호대니 뭐니 운동을 위한 온갖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겉보기엔 그냥 던져둔 것 같아도 나름대로 정리해서 놓아둔 것이다. 그것도 열심히.


방청소를 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역시 머리카락이다. 내가 탈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잔뜩 모으면 그걸로 빗자루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펌을 하지 않으면 관리가 안 되는 반곱슬만 아니었어도 아무런 약품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기부했을 텐데 늘 아쉽다. 아무튼 먼지보다도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바닥청소를 자주 해줘야 한다.


청소를 하다 하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발견했다. 문득 지난 학기말에 반짝이는 새치들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 때부터 새치가 나긴 했고 아빠도 어릴 때 그러셨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난 학기말에 거울 속에서 발견한 새치는 한두 가닥이 아니었다. 불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뽑느라 한참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생각했다. 그랬구나, 내가 이 정도로... 그랬던 그 순간.


이제는 거울을 보며 열심히 뒤져도 새치가 발견되는 일은 드물다. 아주 오랜만에 발견한 새치 한 가닥. 그것도 자연스럽게 빠졌다.

오늘은 지난날들과 달리 그렇구나, 내가 이 정도로 좋아졌구나. 했다.



육지사람


나가기 싫었지만 점심때에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했다. 제주 삼춘네 아들들 학업상담을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삼춘이 맛있는 김밥을 무려 세 줄이나 사다주셨다. 친구분이 운영하는 곳에서 날 위해 받아왔다고 하셨다. 집에서 직접 담은 댕유자청도 한 병 가져다주셨다. 처음에 댕유자가 뭔지 몰라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제주도 토종 감귤인데, 이름과 달리 흔히 아는 유자와는 다르다고, 약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청을 좋아하고 몸에 좋은 건 더 좋아해서 정말 감사했다. 맛있으면 파는 곳을 찾아 서울 갈 때 사가야겠다 싶었다.


저번에 펜션 사장님도 그러셨고 삼춘도 그러시는 게 다들 제주와 서울의 교육 환경 비교를 넘어 아이들의 수준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셔서 놀랐다. 나도 대도시는 아닌 지방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환경적인 차이를 느끼긴 했지만 아이들의 평균치는 다르지 않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직접 교육을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내가 환경을 많이 타지 않는 편이고 학습에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편이라서 잘 못 느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환경이나 분위기라는 게 정말 중요한 거구나, 그래서 지역별로 차별화된 지원이 꼭 필요하구나 또 배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릴 때부터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해왔던 아이들은 좀 부러웠다. 바다와 맞붙어 자랐다는 점이.



학업적인 교육 환경 측면을 제외하고는 삼춘은 이 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많이 보여주셨다. 대포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권해주시기까지 했다. 들으면서 계속 궁금했다. 섬에서 태어나 자란다는 건 어떤 걸까, 이방인이지만 내가 이 섬을 늘 그리워하고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삼고 싶어 했던 건 또 어떤 이유였을까. 삼춘이 내가 살던 곳을 '육지'라고 지칭하셨을 때 왜인지 묘했다.


육지사람은 섬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근본부터 다를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표현이었다.



다채로운


공기가 나쁜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왕 나와버린 김에 산책까지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엔 물이 발끝까지 차올랐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저 멀리 후퇴했다. 밀물과 썰물의 주기를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때그때 바위 해안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썰물의 정도에 따라 드러나는 바위의 색이 다르다는 점.


이번 썰물은 좀처럼 보기 힘든 하얀 바위들을 드러냈다. 여기 바위 해안의 짙은색의 바위들 사이로 하얗게 칠이 벗겨진 것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좀 있긴 하지만 그건 바다새들의 배설물에 덮여 그런 거라고 했다. 그 외에는 모두 검은 바위, 최소한 짙은 회색이다. 그러다 바다가 물러나면 그 아래 녹색 이끼 낀 검은 바위들이 드러나고, 이번 썰물처럼 아주 멀리, 마치 범섬까지 길을 열 태세로 바다가 물러나면 온통 하얀 바위들이 바다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삼색 줄을 이룬 바위들, 그리고 그냥 파랑보다는 너무 짙고 남색보다는 밝은 빛깔의 바다. 그 너머의 범섬과 말 그대로 하늘의 색, 하늘색은 영어로도 skyblue여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는 옅은 빛깔과 하얀 구름 조각의 뒤섞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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