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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25-27일 차 : 빗속의 달리기

새벽 울음,오늘 바다는 하루 종일 흐림,아틀란티스,믿음,짙푸른,전깃줄

25일 차


새벽 울음


눈 떠서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바람 소리인데 요즘은 닭 울음소리도 아주 잘 들린다. 겨울이라고 닭이 울지 않고 늦잠을 잘 리도 없는데 왜 요즘 들어 잘 들리게 됐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내 귀가 점점 열려서 그런 게 아닐까.

곧 동이 틀 거라며 목청 높여 우는 소리는 '꼬끼오'보다 '어이오'와 비슷하다. 마치 누구를 부르는 듯한 소리다. 수탉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고 그를 속이던 끝에 결국 어리석은 결말을 맞이한 나무꾼의 환생이라던데, 나무꾼은 이제라도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그리움과 회한뿐일까.


새벽 울음을 들으며 일찍 집을 나서면 사람이 적은 길목을 새들이 채우고 있다.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새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학명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생김새를 보고 다른 종들을 구별할 수 있다. 몸집도 생김새도 얼마나 다채로운지. 내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물이 아니라 공기가 70%는 될 법한 그 가벼운 몸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그런 가벼움이 부럽다가 문득 곰이 먹다 남긴 연어를 뜯어먹던 육식 갈매기의 모습이 떠올라 아찔해지기도 했다. 왜인지 새들은 채식 동물이 아닌데 그렇게 착각되곤 한다. 무해한 이상을 그들의 날개에 대입하곤 해서 그런가 보다.


갈수록 그렇게 작고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크고 무거운 것들은 언제나 작은 것들 위에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바다는 하루 종일 흐림


바닷가의 햇볕은 남다르다. 기온보다 일조량에 따라 낮 기온이 좌우될 정도이다. 어제는 봄이 온 마냥 아침 9시부터 한낮같이 더웠는데 오늘은 잔뜩 흐려서 간만에 습하긴 해도 기온에 비해서는 덜 덥다. 내일은 비가 온단다. 장대비가 내리고 돌풍이 몰아쳐 많은 것이 씻겨 내려가면 좋겠다. 농민도 어민도 많은 이 섬에서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흐린 날이면 잔잔하게 부딪혀오는 바다의 소리가 좋다. 유난한 사람이 아니라 잔잔하게 별난 사람이고 싶었던 나에게 어울리는 소리다.



오늘은 달리기 대신 걷기 운동을 했고 한 달 간의 운동 기록을 돌아보았다. 달리기는 온몸 운동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허벅지뿐만 아니라 팔과 어깨, 등, 목이 다 탄탄해진다. 잠 못 드는 밤이면 조금쯤 단단해진 팔다리를 주무르는 게 습관이 될 것 같다. 거짓말 같지만 겨우 한 달만에 약간의 근육이 붙었다. 아마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소실되었던 생활 근육이 아닐까 싶지만 기쁘다.



26일 차


빗속의 달리기


어쩌다 팔자에도 없는 우중 질주를 했다. 새벽에 눈을 떴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와 돌풍을 원하긴 했지만 내가 달린 후에 오길 바랐던 터라 나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게 창밖을 주시했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불면증 때문에 복용하던 약들, 내가 잠들게 해 주고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약을 감량하려고 하니 몸이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불면증이 재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달리기라도 해서 우울함을 벗어나야 했다. 비가 온종일 온다는데 내내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산까지 손에 쥐고 패기 넘치게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거세게 불어와서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아가려면 힘이 배로 들었고 달렸더니 그야말로 거북이 속도로 바람을 밀어내면서 겨우겨우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나갈 때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작된 달리기를 끊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냅다 뛰었다. 걷는 구간에서는 바람이 불어오는 서쪽 방향으로 걷고 달리는 구간에서는 돌아서서 동쪽으로 뛰었다. 그렇게 반복하면서 40분을 걷고 뛰는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다.


처음엔 와 어쩌지 싶다가 점점 그냥 웃음만 터져 나왔다. 날씨 탓인지 사람이라곤 노부부 한쌍뿐인 데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를 비롯한 온갖 소리에 묻혀서 창피할 것도 없어 헐떡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돌풍에 맞서서 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상황이, 아니 그냥 모든 것이 다 우스웠다. 우습고 재미나서 신이 났다. 나만의 우중 노래방이 열렸다.


오래도록 「빗속의 아버지」라는 시의 한 구절이 마음속 어린 나를 울렸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언제나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운명 같던 내 유년기의 슬픈 부분. 그 부분을 이루던 시구(詩句)가 오늘 비를 맞으며 달리는 동안 마음 한 켠에서 조금은 씻겨 내려간 듯하다. 빗속의 진짜 추억이 생겨서.




아버지 빗속으로 가신다, 시간의

굳게 잠긴 빗장을 걷고

빗줄기가 풀어놓은 비낱의 창 너머 무수히

그어지는 텅 빈 골목길로

아버지 걸어가신다, 얼마만큼 쫓아가다

내 기억의 비 그쳐


다시 꽃밭이었을까요, 아버지

화아한 그 꽃밭 뭉개며 내 마음의 어둔

그림자로 우뚝 서 계시는 아버지

얘야, 식구들 모두 모여 살 수 없단다, 네가

잠시만 떨어져 있었야 겠다


담을 것 없어도 주체할 길 없이 쏟아지는 잠과

잠의 깊은 늑골을 비집고 비가 온다, 어느새

한 세상 빗속으로 저무는데

밥과 밤으로 이어지는 중년을 흔들어 깨우며

머리맡에 앉아 계신 아버지, 기다려라

내가 너를 데리러 다시 올 때까지


그러므로 아버지, 제가 여기 있어야 한다면

저는 녹스는 제 몸을 온전히 닦아낼 수 있을까요? 

칼날의 시간 작두 위에 세웠던 세월이여

아직도 식지 않는 증오 서리처럼 흐리는 창 너머로

아버지 빗속으로 걸어가신다


김명인, 「빗속의 아버지」




아틀란티스


드물지만 미세먼지가 이 시골 바닷가까지 뻗쳐오는 날들이 있다. 범섬이 해무가 아닌 중금속으로 된 회색 안개에 가려진 광경을 보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미세먼지 농도가 심한 날이면 기분이 저조하고 한없이 더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서울의 심각한 대기오염은 외출 자체가 심각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미세먼지로 세상이 흐려진 날이면 공기가 맑은 비-도시를 동경하곤 했는데, 인간이 만든 미세먼지는 비-도시도 예외 없이 오염시키려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비-도시에서도 그저 조금 천천히 찾아오는 재앙일 뿐인 것을.


그러나 결국은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나도 미세먼지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그 동족 혐오와 자괴감이 내 고통의 실체임을 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주어진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를 반성하며 마주한 원시의 세계와 공존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이?



썰물 때 포구 쪽의 바윗길을 산책하다 보면 고인 바닷물이 맑고 투명해서 바위의 결이 마치 물아래 산맥처럼 비쳐 보인다. 꼭 숨겨진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바라게 된다.

저 작은 세계에는 부디 내가 없기를. 그러나 다른 내가 모든 생명과 공존하고 있기를.

부질없지만 아름다운 어떤 상상을 했다.




27일 차


믿음


오래도록 의지해왔던 무언가로부터 독립하는 일은 어렵다. 그냥 그걸 지워버리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그것 없이도 홀로 해낼 수 있는가를 다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확인이, 믿음의 회복이, 당장의 도움의 부재를 메우는 일보다 더 어렵다.


나를 괴롭히는 수면장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약의 도움이 절실했다. 노력이나 의지로 달라질 사안이 아니었다. 회복도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몸이 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새벽에 눈을 뜨고 억지로 잠을 청해도 선잠이 최선인 데다 그나마도 악몽이나 불쾌한 꿈을 꿔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약을 조금 처방받았다. 하지만 새벽에 깨는 일은 계속 잦아졌고 나중에는 잠들기 위해서도 약을 먹어야 했다. 결국 잠들기 위한 수면유도제, 오래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 깊이 잠들 수 있게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약까지 수면 전반에 걸쳐 약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는 늘 잊지 않았다. 이 약들은 보조 역할이지 해결책이 아님을. 그래서 약을 먹으면 제대로 길을 찾아오는 잠을 반기며 하나하나의 감각을 익히려고 했다. 약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절하듯 잠드는 감각에 익숙해졌고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언제든 저항하지 않고 잠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약의 도움 없이 수월하게 낮잠에 들 때면 기분이 좋았다. 잠드는 일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처럼 느껴지는 게 우습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가장 끊기 어려울 것 같던 수면유도제를 감량하고 복용을 서서히 중단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오산이었다.


수면유도제는 이미 반 알만 복용하고 있었고 감량법을 한 알에서 반 알로, 반 알에서 중단으로 안내를 받았기에 서서히 줄이는 법이 없어서 뚝 끊어야 했다. 그랬더니 다시 깊어가는 밤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매일 밤 잠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을 잊고 있었다. 스르륵 잠드는 일이 축복임을 잊지 않으려고 했고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알게 모르게 나는 약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겼었나 보다. 점점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어둠과 함께 잡생각과 긴장감, 초조함,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인 불편감이 우르르 찾아오니 밤 자체가 불안한 시간이 되어간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내가 아직은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밤은 어제보다 낫겠지, 내일 밤은 보다 낫겠지. 그게 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나도 곧 남들처럼 나쁜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겠지. 힘든 밤을 보내고도 스스로를 그렇게 달랠 힘이 남아있으므로 나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은 조금 늑장을 부렸다. 아무리 피곤해도 다시 잠들지 못하는 몸이 늘어지는 대로 그렇게 아침을 느긋하게 보냈다. 발목도 시큰거리는 게 오늘 쉬어야 내일 더 잘 달릴 테니.


몸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자며 스스로를 다잡는 내 마음을 아는 듯이 먹구름이 걷히고 날이 점점 개이고 있다. 이제 서울에 돌아갈 일도 없으니 나만의 학기가, 자유학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짙푸른


느지막이 산책을 나섰다. 비가 오고 나면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게, 어제 그렇게 날이 흐리더니 오늘은 햇볕도 바람도 공기도 그리고 바다의 빛깔조차도 남다르다. 여느 때보다도 수위가 높아져 바다가 담벼락에 걸터앉은 내 발끝에 닿을 것처럼 차올랐다. 손을 뻗으면 바다 그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 갈 것 같은 그런 짙푸른 바다가 발아래 펼쳐졌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경계들, 담벼락과 큰 바위, 그런 것들에 걸터앉아 바다 사진도 내 사진도 잔뜩 찍었다. 돌아와서 점심으로 두부 부침을 하니 고소한 냄새가 바닷가 특유의 공기에 섞여 입맛을 돋운다.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 동안 열어둔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다시 나오라는 듯이 집 앞의 나뭇가지를 흔들어댄다. 분명 위협적일 정도로 거친데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가 나와, 나가자, 그런 다정한 권유처럼 들렸다. 맞다. 사실 오늘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좀 더 신나는 척을 하려다 정말로 신이 나버려서 나들이가 너무 즐거웠다. 밥을 든든히 먹었더니 또 나가고 싶다.




전깃줄


저녁이 되어 다시 산책을 나섰다가 독특한 장면을 마주했다.


지하에 매립된 오만가지 것들이 일상을 지탱하는 서울과 달리 여기서는 어딜 가나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이 일상을 팽팽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발아래가 늘 불안했던 때, 내 일상의 토대가 예고 없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재앙을 상상했던 때가 있었다. 서울의 우리 동네에서 큰 논란거리였던 싱크홀이 우리 아파트 바로 앞 도로에 출현했을 때 신기해하는 언니 곁에서 나는 두려웠다. 그렇게 내 발밑도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 도로처럼 소리 없이 꺼질까 불안했다. 그 아래가 단단한 흙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어두운 동공일까 봐 더욱 무서웠다.

그러나 이 섬에 온 지금은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곤 한다. 비바람에 전신주가 넘어지고 전선이 끊어지면서 시작되는 재앙에 대한 상상이다. 하지만 그 어떤 비바람에도 이 섬의 모든 것은 굳건했다. 집 앞까지 찾아와 나를 겁주던 싱크홀 대신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늘어선 전신주를 보며 재앙은 아득히 먼 상상으로 잊힌다.


그리고 그 아득한 상상조차 오늘부터는 자취를 감출 듯싶다. 상상의 대상 위에 새떼가 줄지어 앉아 회동을 갖는 광경에 무의미한 상상을 멈추고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높고 가느다란 가지들이 뻗어있는 나무가 없는 바당길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새들이 전깃줄을 나뭇가지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새벽에는 길에서 종종걸음 치지만 저녁에는 길에 사람도 차도 많다 보니 나무 대신 전깃줄 위로 날아오르는 모양이다.


내 불안을 날려버린 새들의 기막힌 저녁 회동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전신주 대신, 도로 대신 튼튼한 나무들이 대열 없이 우연에 따라 자라났다면 이 해안의 풍경은 어땠을까? 적어도 무너지고 끊어지는 것들에 대한 상상보다는 아름다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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