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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22-24일 차 : 비-도시의 별, 바다와 아프리카

해와 달,할 거야,마음의 무게,눈썹달,다른 그림 찾기,다듬으며 살기,환호

22일 차


해와 달


해와 달이 만날 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는 검푸른 하늘이 산호빛으로 밝아오다 옅은 푸른색이 되는 걸 봤고, 노란 달이 창백하게 바래지는 걸 봤고, 새벽빛이 붉은 해와 함께 갈무리되는 걸 봤어.

붉은 해가 노란빛이 되어가는 동안 창백해지는 달도 함께 떠 있었다. 아주 조금씩 그들은 떠오르고 지고 그 사이에서 같은 하늘에 머무른다. 그렇게 서로 만난다.



해와 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어둠 속에 눈을 떠 요가를 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잠시 생각해보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어슴푸레한 새벽을 달리다가 붉은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 걸음을 돌렸다. 새로이 시작된 아침 해를 등지고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달리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라고 범섬과 새들에게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뭐든 반반이 좋다. 환절기, 썰물과 밀물이 있는 해안, 아침과 밤 사이의 새벽, 그런 지나가는 길목들이 좋다. 그 길목에는 둘 다 존재하고 무엇하나 지워지지 않는다.



할 거야(해야 한다 X)


요가를 하면서 하루를 계획하곤 한다. 오늘은 달리기를 하고 소설도 읽고 건강한 식사를 할 거야. 글도 좀 쓰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 안 해도 그만인 일들로 하루를 채울 거야. 누워서 속삭였던 혼잣말들을 오늘도 다 이루었다.


오래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붙들려 살았다. 불과 한두 달 전의 달력을 보면 서른 개의 네모난 칸들이 색색깔의 할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모든 걸 다 하고 살았다. 마감에 맞춰 일을 할 줄을 몰라서 나만의 마감을 만들곤 했다. 그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이라고 자부하기도 했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실제 마감보다 최소한 하루 이틀은 빠르게 모든 과업을 마쳐야 불안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해낼 수 없는 계획을 세워서 매일 밤 조정하고 또 조정하곤 했다. 그렇게 해야 하루 이틀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나는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미루는 게으름뱅이가 되었고 매번 빠르게 일을 마치면서도 자책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겉으로 볼 때 나는 늘 빨리, 많이 일하는 기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날 보며 사람들은 성실하다고 해주었지만 나는 그 성실하다는 말이 언제나 무거웠다. 점점 마감에 맞춰서 무언가를 하는 것조차 불성실한 범주로 생각되었고 나는 '성실한 나'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더 빨리, 더 많이 해내야 했다. 나만의 마감은 점점 앞당겨졌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은 늘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많이 미루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자책하고 힘들어하면서 나는 계속 성실한 사람일 수 있었다. 점점 사람들은 내가 시간이 많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들이 쉴 때 일하고 공부했는데. 이를 악물고 빨리 하려고 애썼는데. 그 모든 노력이 사람들의 칭찬 앞에서 오히려 지워지는 기분이 무엇인지 누가 알까? 사람들은 나는 남들보다 적은 시간, 적은 노력을 투자해도 괜찮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머리가 좋지도 않고 요령이 있지도 않다. 그저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보일 뿐이었다.


결국 남은 건 나도 필사적이라는 것, 힘들고, 어렵고, 아프다는 걸 말하지 못해서 속으로만 곪아가는 마음뿐이었다. 힘들다, 어렵다, 그런 토로도 내 입에서 나오면 잘난 척이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아 말하지 못했던 날들. 점점 나를 걱정하지 않던 사람들.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칭찬의 말들, 격려의 말들이 내게는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나는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남들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마음도, 나도 그저 아프고 힘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포기하지 못하고서 아무도 모르는 병을 홀로 앓았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한다'라는 의무와 강제의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고 싶다', '할 거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서 여유를 찾아나가기 시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도 좋고 시간이 많아서, 넘치게 받은 귤들을 하나하나 까서 보관하고 얼어붙은 야채를 정리하고 방을 새로 꾸몄다. 그러고 좀 쉬면서 방 밖을 봤는데 오늘따라 물결이 반짝거려서 꼭 저녁 산책을 나갈 거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저녁까지도 바뀌지 않아서 예정대로 산책을 나갔다. 나가보니 생각보다 더 신나서 바다를 옆에 끼고서 한참을 걸었다.


매일 같은 길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 속에서 매일매일이 새로운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늘 같은 바다를 보다 보니 단조롭고 지루한 감정을 느껴 쉽게 우울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속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가 바닷가는 지루하다고 했지? 바람도 햇살도 물결도 파도소리도 모두 매일매일 다른데.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내일은 장을 보러 갈 거다. 읍내라고 해야 할까, 마트 가는 길에 마을 강아지들과 마주치면 좋겠다.



마음의 무게


산책을 하다 보면 돌탑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에 가면 사람들이 쌓아둔 돌탑이 아주 많다. 사실 나도 저번에 반질반질하고 예쁜 돌을 어렵게 골라 돌탑들 옆 살짝 패인 바위틈에 올려두었었다. 바람에도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 같은 자리였다. 하지만 다음날 가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


사라진 내 돌처럼 그 많던 돌탑들도 무너진다. 한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기후에 시달리면서 돌탑은 매번 무너지고 또 세워지고 다시 무너졌다.


매번 무너지는 돌탑에 씁쓸해하다가 도로시가 떠올랐다. 폭풍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폭풍 덕에 오즈로 가게 된 도로시. 사람들이 때론 무겁고 때론 가벼운 기원을 담아 올린 돌탑도 그 기원의 무게만큼 흔들리지 않다가 어느 순간 힘을 다해 바람에 몸을 싣고 오즈 같은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닐까? 기원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닿는 건 아닐까? 적어도 돌에 담겼던 그 마음들은 바람에 실릴 정도로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이 덜어놓고 간 마음들이, 소망이 닿아야 하는 곳에 닿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해안을 찾아와 돌탑을 쌓고 떠난 사람들이 조금쯤은 가볍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바랐다.




23일 차


눈썹달



초승달보다 눈썹달이라는 말이 더 좋다. 달을 통해 하늘에 달린 작은 눈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눈은 아마 오래도록 감겨 있다가 초승달이 뜨는 밤에만 슬쩍 떠져서 세상을 내려다볼 것이다. 하늘이 눈을 뜨는 날이면 누군가 우리를 지켜봐주고 있는 따스한 느낌에 외로움과 슬픔이 가실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초승달이 뜬 밤마다 외로움을 상기하면서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는 거겠지.


보름이 지나니 새벽에도 창밖 정면으로 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담기는 어렵지만 선명하고 밝은 눈썹달이 하늘에 섬세한 선을 그린다. 달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 달빛과 함께 두꺼운 유리창에 가렸던 작은 별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반짝하고 빛나는 그 별빛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집중할 때만 보이는 어떤 것들은 달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 찰나의 빛 너머에 항상 그 작은 별들이 있음을 잊지 말자. 그렇게 속삭이며 다시 한 번 심호흡.



다른 그림 찾기


동이 트자 눈썹달은 수평선 너머로 졌다. 언제나처럼 바닷가에는 새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 중에서 가장 친숙한 새는 역시 비둘기다. 멧비둘기는 한국의 토종 비둘기라고 한다. 얼룩무늬가 매력적이고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회색 비둘기보다 덩치가 다소 작아보인다. 아침 운동을 하며, 장을 보러 가며 멧비둘기들을 한참 쫓아다녔는데 도시 비둘기들과 달리 조금만 다가가면 날아가버리는 경계심과 자유로움, 가벼움을 유지하고 있다. 겨우겨우 아주 가까이에서 멧비둘기를 살필 기회를 얻었다. 멀리서 보면 바위와 혼동될 것 같다. 바다 위에서 새들은 어두운 점처럼 잘 보인다. 하지만 바닷가의 검은 바위는 새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그들이 은신할 수 있는 배경도 되어주나보다. 멧비둘기의 어두운 얼룩무늬는 현무암 위에서 일종의 보호색으로 기능한다.


멧비둘기가 바위와 한 몸이 되어 이동하면 그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가끔 일상에는 아무도 모르게 저 먼 바위쪽으로 사라진 멧비둘기보다 더 당황스러운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나보다. 내가 서울에 다녀온 며칠 사이에 은행과 마트가 증발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은행과 마트가 함께 꽤 걸어가야 있는 마을회관쪽으로 이전해버려서, 장보러 가는 길에 멧비둘기의 꽁무늬를 쫓던 나는 말 그대로 닭 쫓던 개가 되었다. 낯선 초행길은 같은 거리여도 더 오래 걸리는 법이다. 한 길인데도 길을 잃을까 불안해하며 한참을 걷고 마침내 도착한 마트에서 장을 보고 걸어온 길의 두 배를 걸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낮엔 그야말로 늘어져 자버렸다. 그래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동네를 헤매고 바닷가를 걷는 동안 다양한 새들을 만나 즐거웠다. 내가 점점 많은 새들을 발견하게 되듯이 저 새들도 나를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다듬으며 살기


낮잠을 달게 자고 눈을 뜨자 장 봐온 것들이 눈에 들어와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먹고 사는 일은 소비로 시작해 소비로 끝나며 그 사이에는 언제나 다듬고 정리하는 작업이 있다. 먹는 일에서는 특히 그 중간 작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장을 봐오면 냉장고 정리를 해야 하고, 보관하기 위해 소분 작업도 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그 재료들을 또 열심히 다듬어 요리해야 한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사는 일이 다 그렇다. 내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소비가 필요한데 보다 알차고 윤리적이며 낭비 없는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다듬고 또 다듬는 노동이 요구된다. 힘들여 그렇게 다듬어두면 그 이후엔 모두 단순하게 돌아간다.


다듬어진 야채는 보관하기도 쉽고 요리했을 때 보다 정갈한 결과물이 된다. 먹기도 쉽다. 다듬어진 삶도 그렇다. 몸과 마음을 잘 다듬는 과정은 품이 들지만 보다 충만하고 건강한 생활을, 그리고 신념을 지키는 삶을 가져다 준다.


다듬기는 참 중요하고 한 번 할 때 적당히 해두면 여러 날이 편해진다. 하지만 많이 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든다. 마트에서 990원이라는 아주 싼 가격에 엄청 큰 양배추 반 덩어리를 얻어왔다. 더 작은 걸 원했지만 선택지가 없어서 그만. 결국 썰고 씻고 담고 썰고 씻고 담고 이걸 한 다섯 번쯤 해야 했다. 순식간에 초저녁을 도둑맞았다.


다듬은 양의 극히 일부와 애호박으로 야채찜을 해먹었다. 멸치육수가 들어가서 완전 비건식은 아니지만, 비건빵집에서 사온 올리브 치아바타를 식사빵으로 선택했기에 대충 오늘 저녁은 넓은 의미의 채식의 날이라고 하기로 했다. 언제 먹어도 야채찜은 맛있고 속도 편안하다. 아끼는 동생이 양배추 스튜 레시피를 알려준 덕에 양배추를 갈아먹으며 위 건강을 많이 회복했는데, 그 이후로도 이렇게 양배추를 잔뜩, 보다 편하게 찜을 해서 먹으면서 소화불량과 위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


냉장고에 다 넣기도 힘들 정도로 양배추가 많아서 정리하느라 과외 시간도 미루고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지만 그만큼 허기져서 아주 귤맛이었다. 그런데 정작 후식으로 준비한 말린 귤은 시간도 없고 배도 불러서 먹지 못했다. 내일도 모레도 매끼 양배추를 먹겠지. 내일은 저녁 산책을 일찍 나가서 치아바타도 새로 사와야 겠다. 양배추찜으로 소화가 잘 되는 만큼, 몸속의 묵은 것들과 함께 위선이라는 마음의 그림자도 조금씩 지워나갈 수 있으면 한다.




24일 차


비-도시의 별


별은 도시와 비-도시의 척도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의 별만 보이니까. 그나마도 재개발로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가 늘어가면서 너무 키 큰 인간과 너무 밝은 과시에 별빛은 압도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가볍게 명상을 하고 달을 보며 요가를 하려고 커튼을 걷었는데 깜짝 놀랐다. 여기 와서 별이 이렇게 많은 하늘은 처음이었다. 육안으로는 쏟아지는 별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진으로 찍어보니 내 눈이 보지 못한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문명을 떠나고 싶었지만 어떤 문명의 기술은 우리의 감각 너머를 열어젖히기에 포기할 수 없다. 사진기를 조작하며 꼭 필요한 기술 목록에 사진기를 올려놓았다.


바닥에 털썩 앉아 별과 달을 보며 아침을 먹었다. 가본 적 없는 우주를 상상하면서 짙은 남빛의 하늘과 점점이 박힌 별들을 세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환호


오늘도 해를 맞이하며 달렸다. 숨 가쁘게 달리고 강한 바람 앞에서 웃었다. 한껏 솟은 광대가 내적인 환호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용한 아이였다. 이곳에서도 사장님은 내가 먼저 연락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아가씨라 먼저 손 내밀어줘야겠다는 친절한 말씀을 하시고, 아빠도 친구분들께 나를 그런 사람으로 소개했다. 심지어 꼬꼬마 시절엔 이보다 더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다. 머릿속은 우주처럼 광활하고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그런 복잡한 세계였던 반면 바깥 세계의 나는 너무나 조용하고 표정으로만 말하는 아이였다.


처음 연합동아리에 들었을 때 그런 나에 대한 뼈아픈 말부터 듣기도 했다. "어깨 펴, 펴고 다녀."

나의 소극성이 그렇게 움츠린 자세로 드러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아주 외로운 아이이기도 했다. 혼자인 시간이 누군가와 함께인 시간보다 훨씬 많은 아이. 부모님은 그런 내가 또래집단에서 겉돌까 봐 늘 걱정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대체로 나는 군중 속에서 혼자인 것만 아니면, 체육 시간에 짝이 없다거나 함께 점심을 먹을 친구 무리가 없다거나 그런 상황만 아니면 혼자여도 괜찮았다. 다만 겁이 많아서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어떤 존재가 내 곁에 언제나 머물러주기를 바라기도 했는데 내 그림자에 생명이 깃들기를 바란 적이 많았다.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면서도 혼자였던 나는 내적으로는 무척 복잡하게 분열되어 있기도 했다. 자라지 못한 어린 내가 있고, 엄격하고 쉽게 사랑을 내어주지 않는 무서운 선생님,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 나는 그렇게 최소 셋으로 분열된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는 언제나 선생님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애를 썼지만 무엇을 얼마나 해내야 할지 알지 못했고 한 번의 실수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낙담하곤 했다. 나는 그런 어린아이에게 완벽하라고 말하는 선생님이기도 했고 그런 둘을 바라보느라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한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가슴을 펴고 걸으려 한다. 달리기의 기본자세는 전방 30m 앞에 시선을 두고 척추를 곧게 세우고 어깨가 말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바른 자세로 몸 어디에도 늘어지는 곳이 없도록 하며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을 신경 쓰지 않고 한껏 팔을 벌리고 머리 위로 흔들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게 된다. 나도 모르게 환호하며 기쁨에 차 웃으며 달리게 된다. 다시 조용한 아가씨로 돌아가더라도 달리는 순간만은 온몸으로 말하는 나. 그런 내가 낯설고도 좋다.


또한 지금, 해를 등지고 아침보다 먼저 길 끝에 닿고자 달려 나갈 때 한껏 길어진 내 그림자와 나는 항상 함께라고 느낀다. 오늘따라 짙푸른 바다와 소란스러운 바람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어도 그림자가 있어 나는 외롭지가 않다. 아무 말이 없어도 언제나 내 발끝에서 함께하는 그림자처럼 선생님, 아이, 그리고 바라보는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늘 함께였다. 그들이 결코 서로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서로 닿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아팠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길게 드리워도 결코 내 발끝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와 같이 선생님은 언제나 아이를 지켜보았고 아이는 애를 썼고 그런 내면을 나는 항상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니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키다리 아저씨의 것처럼 긴 나의 그림자만큼 나는 자라고 또 자랄 것이다.



바다와 아프리카


점심을 먹으면서 동물들의 대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를 챙겨볼 정도로 요즘은 건조한 초원에 새로운 길을 내며 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누의 대이동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짙은 색의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생존을 위해 발달된 근육은 섬세하고 강인하다. 건기와 우기가 반복되는 사바나. 정글과 사막 사이의 극단적인 땅. 그런 곳에서 비가 만들어내는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대이동은 경이롭다는 말 외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알래스카의 툰드라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여행 정보를 검색했다가 '럭셔리' 아프리카 여행이라는 표현에 할 말을 잃었다.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한 제국주의적 폭력을 바탕으로 닦인 길을 이용해야 하는 여행지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럭셔리'하다고 칭하는 여행사와 관광객을 참을 수는 없었다. 아프리카를 그렇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아프리카에 함께 가는 꿈을 꾸고 싶다.


그런데 커다란 새와 바다를 눈앞에 두고서 누와 초원을 꿈꾸게 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나는 사바나에 가면 열대우림과 사막보다는 바다를 꿈꾸겠지 싶다. 건기와 우기가 한쌍인 것처럼, 반대되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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