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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38-40일 차 : 안개의 밤

습기,지붕 없는 손님,해무,걱정이 덜한 움직임,기다림,푸른빛,1인분,시선

38일 차


습기

새벽에 눈을 떴는데 습기가 느껴졌다. 기상 정보에서는 건조한 날이라고 했는데 집안은 습했다. 창을 열자 젖은 듯한 바람도 불어 들어온다. 부엌 불을 켜고 커튼을 가리고 창에 붙어 잠시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지만 별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겠다. 흐린 날이다.


착잡한 바람이 밤의 공기를 적당히 흩트려주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단편집은 버거웠다. 강화길 작가도 좋고, 모던 고딕을 차용한, 아니 거의 『나사의 회전』을 모티프로 삼은 듯한 손보미 작가의 소설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자들의 비명을 듣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류의 소설만 모아둔 소설집이긴 하지만 끝없이 퍼지고 묻히기를 반복하는 그 비명 끝에 무언가 있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가장 버거웠다. 반복되고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여자들의 생 너머로 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나.


천희란이라는 작가명을 보고 책을 덮었다. 조용히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이 소설집은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은 들을 만큼 들은 것 같았다. 천희란 작가의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비명소리도 없는 검붉은 현실이 날 것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색과 박동을 마주할 힘이 없다.


창을 닫고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비가 기다려진다. 시원하게 비가 내려 계속 피어오르는 불씨들을 잠재워주기를. 봄비가 그친 후의 땅은 이전과 다를 테고 비명이 묻힌 그 자리에 목소리가 생겨날 것이다.



지붕 없는 손님


이 동네에서는 혼자 다니는 20대 청년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기 혼자 사는 어린 여성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름 읍내라고 할만한 골목에서도 스쳐 지나는 젊은이들은 동행이 있는 여행객들뿐. 사실 나도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객이니 다를 바 없다. 그저 혼자라는 점이 눈에 띌 뿐이다.


또래는커녕 여행객 외의 사람을 만날 일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매일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새나, 마당에 늘 묶여있는(마음이 아프다) 개가 매번 반갑다. 내가 인사를 하며 지나갈 때면 이름 모를 그 개는 항상 나와 시선을 맞추고 반응해준다. 남의 집 마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어 멀찍이서 손만 흔드는데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개를 보면 차라리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저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다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 반가워할 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나날이다 보니 잠시 내 방 테라스에 머물다간 손님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서울에서도 간혹 비둘기가 창가에 앉는 일이 있긴 했는데... 테라스 난간에 고요히 자리 잡은 이름 모를 검은 새는 잔뜩 젖은 깃털을 고르며 몸을 비틀다 누가 마당으로 나오자 날아가버렸다. 비록 창 너머로 만났지만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떠나지 않은 새는 처음이었다. 영화 보다가 어찌나 놀랐지.

새가 떠나고 얼마 안 가 굵은 비가 쏟아졌다. 새들은 비가 오면 어디에서 무얼 하며 깃털을 말릴까? 지붕 없는 삶의 방식이 궁금해진다.




39일 차


안개


1시 20분.

3시 nn분.

4시 15분.

4시 38분.


다시 시작된 뒤척임의 밤. 우울증은 괜찮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그랬지. 나도 그럴 줄은 몰랐지만.


한동안 매일같이 시간에 쫓기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꿈을 꿨다. 과제를 마치지 못했다거나, 등교하는데 자꾸만 지각할 상황에 놓인다거나. 나는 시간 약속을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 지키는 편이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늦을지도 모른다는 그 초조함이 일찍 움직이는 일보다 더 괴롭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통의 크기가 더 작은 습관을 받아들일 때 부지런해지나.


그러나 오늘의 꿈은 평소 꾸는 꿈에 비하면 별로 끔찍하지는 않았다. 단지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눈을 뜰 때마다 그 순간들이 끔찍했다.


다시 약에 의존해야 하는 걸까, 수면유도제와 수면을 지속시켜주는 약의 도움이 절실한 걸까. 그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걸까.


달리러 나갈 준비를 마치고 덩그러니 앉아있는 지금의 기분은 그나마 좋은 편이다. 그게 더 이상한가. 바깥은 봄 안개에 번져버린 가로등 불빛으로 가득하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로의 희뿌연 모습.



해무


내가 지나온 잠 못 드는 밤처럼 뿌연 해무가 범섬을 가렸다. 매일 인사하던 섬이 자취를 감추니 정말로 하늘과 바다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설문대할망이 나타났던 하늘-바다는 어두웠을까? 밝았을까? 땅이 없는, 하늘과 땅과 바다가 나눠지지 않은 이 세상은 무엇이라고 불리었지? 나는 멋대로 그곳에도 해가 뜨고 달이 떴다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를 두려움과 함께 뛰어넘는 신. 모두를 위해 직접 빨래를 하고 밥을 지으며 세계를 풍요롭게 했다는 설문대할망이 신하나 부리고 인간을 시험하는 다른 신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단군의 후예라는 말은 평생을 들어도 와닿지가 않는데 자식을 둘로 찢은, 환웅이 아닌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웅녀라든지, 하늘과 땅을 가른 설문대할망 혹은 마고할미라든지, 그런 어머니들의 딸이라는 것은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믿어왔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누구도 다시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불면증과 해무 때문에 우울했던 것도 잠시, 달리러 나가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모든 것을 내주었다. 가랑비에 젖어가는지 안갯속에 파묻혀 젖어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달렸다. 왜인지 힘이 났고 가뿐했다. 최상의 상태였다.

밤은 아직이지만 아침과 낮은 나의 것이다.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걱정이 덜한 움직임


나는 아주아주 겁이 많고 걱정도 많다. 다니던 길에서 고작 한 블록 떨어지는 일도,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곳에서 평소와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일도, 바깥에 나가 더위나 추위를, 혹은 비나 눈을, 사람을, 차를, 매연을, 먼지를 마주하는 일도 전부 고되다. 너무 많은 고민을 동반한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 사고와 질병에 대해 걱정하고 또 걱정하는 게 일이었다. 심지어 침대 밖으로, 방 밖으로, 부엌으로 향하는 일조차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 나에게 외출은 가장 힘든 모험이었고 집 밖에 있는 시간이 차라리 길수록 좋았다. 고작 십분 나갔다 오더라도 양말을 빨아야 하고 씻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므로 한 번의 긴 외출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문제는 집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절실하면서도 그 시간이 회피만을 위한 것이라면 또 다른 두려움과 불안이 먹구름처럼 우르르 몰려온다는 점이다.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두려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초조함, 그렇게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방식으로 대가를 치를 것 같은 죄책감, 무엇보다도 어떤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결핍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최대한 걱정 없이 불안 없이 집 밖에 나설 수 있는 이곳으로 올 필요가 있었다. 분명한 산책로와 마음을 안정시키는 자연의 소음, 한적함, 맑은 공기 등등. 그 안정감을 알고 나니 어제오늘처럼 흐린 날들이 더 견디기 어려워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나는 걷고 뛰며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곳에서 안정감을 얻으니까.

그러니 어딜 가더라도 공기가 맑고 산책로가 있는 곳에 살아야겠다. 이런 곳에서 살기 위한 길을 찾아 앞으로를 계획해야지. 계속 피할 수 없다면 쟁취하는 쪽으로 바꿔보는 거다.




40일 차


기다림


요가를 하고 아침을 먹고 책도 읽고 청소도 했는데 9시가 되지 않아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8시에서 9시까지 그 한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천천히 흐른다. 아마 직장인들에게는 가장 정신없는 출근시간일 텐데 말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항상 제각각인 게 분명하다. 사람마다 다른 것도 말이다.


10시에 문을 여는 마트까지 걸어갔는데 50분에 도착해서 조금 서성이다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무슨 1인 가구가 장을 봤는데 4만 원이 나와... 물론 일주일 먹을거리는 아니긴 하지만 분명 2만 원 내로 생각하고 왔는데. 난을 보니 난이 먹고 싶고 난을 먹으려면 커리도 사야 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둘 살 거리가 불었다.


집에 오는 길 동백꽃이 꼭 낙하지점을 골라 떨어진 듯이 나무뿌리에 안착해 있었다. 마치 나무에 기생하여 다시 피어난 것 같았다. 한참을 걷는데 햇볕에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시원한 메밀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메밀면이 떡이 되어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편의점에도 소면을 파는지 알아봐야겠다. 다시 요리할 힘이 없어 기력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잠시 누웠다.







푸른빛


안개에 가려 흐릿했던 범섬이 돌아왔다. 짙푸른 바다도 하얀 포말도 안개가 걷히니 선명하다.

선명한 풀빛과 하늘색의 조화, 왜 지구가 푸른빛 행성으로 찬양받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지만 그 점보다 더 작은, 그 점 위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이 별이 소중하다.


방에 들어찬 따스한 햇빛을 한참 쬐고 있었더니 다시 활력이 돌았다. 장 봐온 것들을 다듬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비우는 일까지 일련의 노동을 끝냈다. 씻어둔 야채가 건조되면 소분하는 일이 아직 남았지만 개운하다.




1인분


혼자 살면 요리의 양을 맞추기가 정말 어렵다. 세 번 정도 먹겠다 싶어 손질한 야채를 나눠 담았는데 담고 남은 걸 다 냄비에 넣었더니 넘친다. 더 큰 냄비를 꺼내자니 이미 아래에 멸치 육수를 담은 상황이라 망설여졌다. 처음에는 야채를 층층이 예쁘게 깔았는데 너무 많아서 마지막에는 막 담았더니 엉망진창이 되었다. 일단 끓여보고 남으면 내일 또 먹겠지. 내일은 커리를 해 먹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항상 양 조절에 실패한다. 1인분은 언제나 넘치고 만다.


바다 보면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또 나가야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면 바위에 걸터앉아 소설도 읽을 테다.



시선


오늘의 저녁노을과 바다 빛을 보면서 결코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매일 다른 이 빛깔들을 사진으로는 도저히 그대로 담을 수가 없어서 내 눈에 오래오래 담아두었고 잔상만이라도 마음에 남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것도 다른 시선에서 남기고자 하면 나만의 사진이 된다. 그냥 풍경 사진이 아니고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담긴, 그 누구와도 다른, 내가 바라보는 방식을 담은 사진.


보이는 그대로의 바다와 노을을 담을 수 없다면 내가 노을을 만끽하는 시선을 담겠다. 나에게는 그 순간의 시선이 노을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고 노을 그 자체보다 기억되어야 할 무언가이므로. 찰나의 노을 대신 오래도록 남을 무언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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