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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45-48일 차 : 흐린 날의 고독, 시(詩)적 유리창

비린내,악몽,갈증,찌개처럼 단순한,바람 타기,책갈피,정갈한밥상,머무는곳

45일 차


비린내


산책을 나와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 오늘의 바다 내음을 가늠할 수 있다. 어제는 바닷물이 마를 때 나는 짠내가 났는데 오늘은 비린내가 심하다. 둘러보니 바위 해안에 검은 해초를 말리고 있었다. 미역인가? 바다 비린내 때문에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농축된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단단한 껍질을 가진 것들은 껍질과 그 안의 여린 살 사이에 바닷물을 품고 있다. 그렇게 바닷물을 마를 새 없이 품었던 여린 살에서는 체액과 짠내가 섞여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난다. 그 틈에는 까끌한 모래조차 섞여 있다. 그래서 나는 해산물 중에서도 어패류와 갑각류를 특히 싫어한다. 사실 먹으려고 하면 그 형태가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반면 썰물 때 드러난 바위에서 나는, 말라가는 바닷물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그건 확실히 비린내와 다르다. 자주 햇볕에 노출되어서 그런 것일까? 파도가 지척이기에 오늘은 오히려 바다 내음이 멀다.



린 날의 고독


두부부침 하나로 행복한 점심 식사를 했다. 아니 아침 겸 점심인가? 아무튼 밥을 든든히 먹고 산책을 나가서 담장 밑까지 차오른 바다를 보며 한참 앉아 있었다. 노래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에 앉아있으면 특유의 질감으로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언제나처럼 이른 저녁을 먹고 또 산책을 나섰다. 또 같은 담장에 올라 말라가는 바위와 새들을 바라보았다.


며칠째 해를 제대로 못 봐서인지 세상이 적막하고 외로웠다. 그래서 하루 종일 뭐라도 틀어놓고 지내고 나가서도 노래로 나만의 공간을 세상에 새겨 넣어야 했다. 그렇게 약간의 외로움은 소리로 만든 나만의 영토 속에서 이 한가로움을 더 깊이 있게 하는 고독으로 바뀌었다.

새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 나비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저무는 흐린 날.





46일 차


악몽


한동안 쌀쌀한 바람을 많이 맞았더니 몸이 좀 무겁다. 또 한바탕 수면 위기를 겪느라 새벽에 잠을 못 이뤄 고생해서 그런 것도 있다. 날이 부쩍 흐려 더 그렇기도 하다. 언제 맑아지려나, 해가 나야 빨래를 하는데.


오늘은 아니고 맑은 날의 한때. 그립고 귀여워서.

아침부터 집에서 새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다. 새들이 낮게 날고 땅으로 들어오는 것은 비가 온다는 뜻인데 저렇게 지저귀니 긍정적인 소식인가 싶기도 하다. 부디 맑아지기를 바란다. 양말 빨아야 한단 말야. 햇빛에 바싹 말리고 마르고 싶단 말야. 끈적한 악몽을 다 털어버리고 싶단 말야.


그렇게 툴툴거리다가 결국 며칠 흐리다고 울적해지기 싫어 움직였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침구도 갈아달라고 하고 재활용도 하고 대형마트에서 장도 보고 왔다. 엄마하고 통화하면서 역시 움직여야 힘이 난다고 말했고 그 말대로 장 보러 먼 길을 다녀왔는데도 오히려 활력이 돈다. 점심 먹고 공부를 조금 하고 지금껏 놀다가 산책을 가려고 하니 다시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또 이제 보니 그냥 흐린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좋긴 하다. 깨끗해진 밤처럼 머리도 세상도 맑아지는 기분. 지겨운 먹구름이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가는 그런 느낌.


오늘 하루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상기하는 날이었는지. 사람들과 학교와 세상과 떨어져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리고 다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떠나왔다. 침구 갈아달라는 작은 요청도 지친 내게는 큰 도전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줘야지. 꼭 기억해야지. 무엇보다 내가 여기서 잘 살고 있으며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도.



시(詩)적 유리창


내가 가장 아팠을 때, 해선 안 될 생각을 했을 때 생긴 버릇인 유리창에 이마 대기. 얼음에 손을 대면 살갗이 차디찬 표면에 달라붙으면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유리창에 이마를 대면 통증 없이 매끄럽고 차가운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서늘한 외부를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감각하는 일. 그게 왜 좋은지 그땐 몰랐는데 습관처럼 이마를 대고 곱씹다 보니 불현듯 스치는 시구(詩句)가 있다.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봄눈 대신 봄비가 내리고 나의 유리창엔 아직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리고' 한라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본다.


하지만 언젠간 나도 바다에서 산으로 가지 않을까? 요동치는 바다에서 우물을 어루만지다 더 성숙한 어른이 되면 산에서 호 하고 하얀 입김을 뱉으며 이마로부터 온몸으로 뜻 모를 서늘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인만큼의 깊이는 아닐지라도 유리창 없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더라도 조금쯤은 그가 본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는지. 어찌 되었든 유리창은 나와 외부를 모두 비출 수 있으니.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차고 경쾌하다.

(정지용, 「춘설」, 「유리창」 참조)




47일 차


갈증


빗소리조차 그친 적막감에 몸서리쳤던 불면의 밤을 지나 미뤘던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원래 어제 뛰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서 하루 미뤘다. 대신 많이 걷긴 했지만, 아무래도 날씨 탓도 있고 잠도 못 잤고 하루 걸렀다고 몸이 무겁다.

한 번에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작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냥 박차고 뛰면 어떻게든 될 텐데 아마 뛰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나에게는 더 두려운 듯하다. 그런 나라서 휴학은 생각도 못했던 거겠지. 첫 발작을 겪고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이번 학기 이제 막 시작했는데 종강까지 못 버티면 어떡하지? 였으니. 지금 보니 그게 내 성격이었다. 멈추는 게 두려워 시작도 전에 최악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것. 그리고 최대한 준비된 상태에서 뛰어들려고 하는 것. 그리고 막상 해보면 잘한다. 그것까지 모두 나다.


분명 10도가 안 되길래 잘 챙겨 입고 나갔더니 오랜만에 낯을 드러낸 해가 과하게 뜨거웠다. 타는 듯한 볕에 선크림이 녹아내리고 목이 바짝 말랐다. 이런 갈증은 오랜만이라, 처음으로 걷기 구간에서 잠시 멈추고 물을 샀다.(그 와중에도 달리다 멈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더울 줄 알았다면 텀블러를 들고 나오는 건데 쓰레기를 늘려버렸다.

입 주변이 버석거리고 입안이 말라 침 한 방울 흐르지 못하는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이상한 감각. 몽골 사막에서도 이런 갈증에 내몰리진 않았었는데... 무거운 몸에 갈증에 뻣뻣한 몸과 리듬감을 잃은 다리에 비틀거리며 달렸다. 겨우겨우 오늘의 달리기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햇빛도 선명한 수평선도 또렷한 섬도 눈에 들어온다. 모두 반가웠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에 절로 눈이 감겼다.


힘들었지만 오늘의 달리기도 해냈다. 이제 훈련이 8번 남았다.




찌개처럼 단순한


낮에 그렇게 덥더니 다시 날이 흐려졌고 아직 새떼가 날아가는 건 보지 못했다. 집안 가득 퍼진 음식 냄새. 한가득 쌓인 야채 꽁다리. 내키는 대로 재료를 넣어 간을 한 정체불명의 찌개. 조용하게 잘 흘러가는 일상이 신기하다. 무엇 하나 급할 것이 없고 정체불명의 찌개처럼 단순하고 계획 없는 생활.


그래도 무언가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귀찮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려는 것도 운동이라도 해서 성취감을 느끼려는 것도, 그리고 계속해서 나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도 모두 원초적인 내 모습인 모양이다.



바람 타기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구름이 다림질된 솜면처럼 하늘을 덮은 흐린 날, 종잡을 수 없는 풍향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지자 작은 새들이 아주 낮게 종횡무진하며 눈앞을 스쳤다. 몇 번이나 새와 부딪힐까봐 놀랐고 온갖 방향으로 힘차게 날갯짓하며 바람을 타는 저 새들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 그리 바삐 날아가는지 궁금했다.


손바닥만 한 새들이 화살처럼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사이로, 느린 걸음으로 귀가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나는 요즘 새들이 가장 부럽다. 바람에 올라탈 수 있는 그들의 가벼움에 수만 번의 날갯짓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아니, 그걸 알기 때문에 부럽다.




48일 차


책갈피


누가 꺾은 것인지 바람에 꺾인 것인지 알 수 없는 꽃잎이 바닥에 말라붙어 있다. 마치 책 사이에 말려둔 것 같다. 종이에는 노르스름한 물이 들었을 것만 같다.


내 일상의 한쪽 귀퉁이를 접듯이 걸음이 멎었다.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을 시도해왔다. 계속 계속 시도하면 되는 걸까?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나 확실한 건 여기서 한 장이 끝났고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내 책에도 작은 목차가 생겼고 색인에 이 섬과 마을이 새겨졌다. 그것만으로 남은 한 달이 설렌다.



정갈한 밥상


혼자 밥을 해 먹으니까 보통 음식을 덜거나 하지 않고 조리된 모습 그대로 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남을 대접하듯이 식사를 차려주고 싶다. 요리도 차리는 것도 다 내가 하는 일이지만 냄비가 아니라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면 대접받는 기분이다. 내 입맛에 맞추기보다는 되는 대로 요리하는 편이 아무래도 편하지만 가끔 손님 입맛에 신경 쓰듯이 하나하나 따져서 재료를 고르고 간을 보면, 애정 넘치는 요리사가 곁에서 내가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보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존중과 애정이 정갈한 차림새에 깃들어 있어서 가끔은 잘 차린 밥상을 나에게 주고 싶다. 그런 것치고는... 카레와 난을 담다가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알게 뭐야. 내가 기분 좋았으면 잘 차린 거지. 그런 의미에서 떠오른 추천 소설집, 『파인 다이닝』.(왜 굳이 영어여야 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머무는 곳


사람들이 통과하는 곳은 길이 되고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은 장소가 된다. 나는 이 아름다운 해안이 길이면서 장소였으면 한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쉬어가는 장소로 이곳을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지도 사진을 찍지도 않고 파도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아무 바위 위에나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며 머무르기를.


10분이라도, 단 5분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잠시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장소로 그렇게 경험하고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스쳐가는 관광지 이상으로 이 해안의 장소성을 느끼고 돌아갔으면. 내가 느끼는 바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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