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의 바다,섬 섬 섬,우물 안 개구리?,오일장,꽃 피는 계절,돌 틈 꽃
53일 차
인사
어제 무리했는지 얼얼한 종아리를 두드리며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풀밭에 여유로이 앉아있던 강아지의 인사를 받았다. 산책로를 걷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어느 순간 달려와 내 다리에 그 보송한 털을 부비적거렸다. 따뜻한 온기와 간지러움에 꼼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두 손으로 마구 쓰다듬어주고 너 여기 사니, 가족들은 어디 갔어? 하고 말을 걸다가 강아지가 자연스럽게 돌 틈에 자리를 잡고 몸을 말길래 잠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목걸이가 있으니 아마 동네 주민이 해초를 뜯거나 볼일을 보러 나온 김에 풀밭에 풀어둔 모양이었다. 털 상태도 좋고 착해서 안심이 되었다.
포구 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해녀식당에 사는 고양이를 만났다. 얼마 전에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날렵하게 암벽을 등반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이 작은 고양이도 뿌리가 같다는 듯이 아주 우아하게 바위 절벽을 타고 다닌다. 반갑게도 고양이는 길 위에 선 나를 발견하고는 야옹하고 몇 번 울더니 순식간에 절벽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알레르기 때문에도 그렇고 고양이도 거리를 원하는 동물이라 약간 떨어져 앉아 같은 눈높이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너무 세져서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야옹, 야옹, 하고 작게 몇 번 우는 게 꼭 배웅 같았다.
매일매일 인사했던 보람이 있다. 먼저 인사를 받다니!
불모의 바다
큰 파도 이후에는 짙은 갈색의 해초들이 해안에 밀려온다. 그 해초들을 건져다 위쪽 바위에 말려두면 검은빛으로 변하는데 짜고 비린 냄새가 아주 강하다. 미역이 아닌가 싶다. 바다가 직접 가져다준 해초를 말려 생계수단으로 삼는다는 건 꽤나 자연스럽고 무해해 보인다. 무엇보다 아직도 이렇게 해초가 밀려온다니 다행스럽기도 하다.
한때 제주도에서는 가까운 바다에서도 낚시가 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배낚시 지점이 보다 먼바다 쪽으로 옮겨갔단다. 물고기들의 서식지이자 먹이인 해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백화현상. 바다 밑 해초가 가득하던 자리에는 이제 바위와 모래뿐이고 하얀 석회만 쌓인다.
사람들은 바다 밑이 메말라갈수록 바다가 죽어간다고 표현한다. 파도가 넘실대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고 해서 바다의 생명력이 넘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픈 일이다. 언제나 젖어있는 바다 아래가 불모지라니...
54일 차
섬, 섬, 섬
집 앞 해안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과 섬들이 보인다. 생각보다 제주도에는 큰 섬들이 많지 않은데 법환에서는 여러 섬들을 볼 수 있다. 서쪽으로 보이는 산과 섬들은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기생화산인 삼매봉, 긴 다리를 지나 나무가 많이 자라는 섶섬, 그리고 섬 위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바위섬이지만 그 아래에는 풍요로운 해양생태계가 펼쳐져 있다는 문섬이다.
밤에 삼매봉의 한 봉우리에 올라 손을 뻗으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에 닿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요즘 동틀 때 보면 항상 해가 섶섬 뒤로 떠올라서(나중에 보니 해 뜨는 위치도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새벽에 섶섬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섶섬과 해에 관련된 전설은 없는지 궁금하다.
나란히 자리한 섶섬과 문섬, 두 섬이 전혀 다른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니 그 자체로 신비롭고 낭만적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보이는 두 섬이 다가가서 보면 사실은 땅과 바다를 대표하는 낙원이라니. 꼭 소설에 써야지. 자연의 이야기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된다.
우물 안 개구리?
사장님은 당신을 섬에서 나고 자란, 많은 세상을 만나보지는 않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칭하셨다. 하지만 몸무게 미달로 헌혈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체구로도 큰 화분을 두 개씩 이고 지고 가시던 그 뒷모습처럼 가정과 여러 사업을 온몸으로 이고 살아온 분의 세상이 좁을까? 내가 아는 사장님은 보수적인 섬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능력을 증명해온 분이다.
사장님은 약속대로 나를 오일장에 데려가 주기로 하셨는데 오전에 제주시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부터 동행해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한가했기 때문에 기쁘게 수락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강행군이 되어서 다소 피곤하긴 했지만 정말 재밌었다. 가구점에서 가구를 골라 계약하는 과정도 구경했고 화훼농원에 커다란 방이나 다름없는 꽃 냉장고가 있다는 것도 배웠고 화분에 뿌리내린 꽃나무들을 다루는 난원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온통 새로웠다. 그 밖에도 서귀포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변천사, 늙은 벚나무를 알아보는 법, 포구와 달리 범섬이 있어서 우리가 안전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깊은 우물이라면, 우물을 속속들이 알고 자기만의 세계로 꾸며왔다면, 가보지 않은 우물 밖 하늘을 짐작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참으로 멋진 개구리가 아닌지.
오일장
댕유자는 정말로 건강 관련 식자재를 파는 곳에서 취급하고 있었다. 아주 커다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노지재배만 해서 그런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10kg짜리 녹슨 저울의 바늘이 세 번 회전하는 동안 겨우살이가 뭔지, 참나무는 어디에 좋은지, 오미자청은 어떻게 담은 게 좋은지 그런 알짜배기 정보들을 주워 들었다.(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장사꾼들의 입담과 자연스러운 능청. 신기하게 생긴 묘목들과 흙내음이 남아있는 채소들. 무언지 알 수 없는 온갖 약재와 식재료, 촌스러운 옷들,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풀빵, 맛깔난 떡볶이, 달짝지근한 장아찌.
온갖 것들을 다 파는 대형할인마트에나 익숙한 나에게 재래시장은 그렇게 재미난 곳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엄마, 언니와 떡볶이를 사 먹던 상가가 떠오르는 그런 곳이긴 했다. 상설시장이자 관광지에 가까운 올레시장과 달리 향토시장은 지역주민들 혹은 제주시에서 찾아온 장사꾼들이 정말로 생계를 나누는 그런 공간이었다. 누군가에겐 생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교환이 아니라 진짜배기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말이다.
잔뜩 지친 채로 도착해 빠르게 돌고 나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얻었다. 맛있는 것들도 잔뜩.
55일 차
꽃 피는 계절
그러니까, 나는 매일매일 쉬는 날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히는 날이 필요하다. 먹고 자는 것조차 마다하고 싶은 그런 날, 정확히는 침대에서 허리 디스크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속에서 이율배반적으로 한껏 안락해하는 그런 날. 요즘 식욕도 돋아서 한껏 살이 오른 볼따구를 진정시키려면 과자를 좀 줄여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과자를 밥 대신 주워 먹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과자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역시 가만히 시간을 보낼 때 가장 생각나는 건 과일이더라. 특히 귤. 이제 귤도 철이 다 지나서 열매가 아닌 꽃이 피는 시기가 왔다고 한다. 생각도 못했다. 열매가 맺히려면 꽃이 피어야 하는데 귤나무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평생 잊고 살았다. 아주 당연한 것들을 우리는 자주 잊거나 생각하지 않고 산다.
끝물이라 말랑말랑해진 귤들은 시거나 싱거울 수 있다. 내가 침대에 처박혀 미리 씻어두었던 마지막 귤들을 해치우는 동안 귤나무에는 새싹이 자라고 봉오리가 돋아 꽃을 피울 것이다. 다음 열매를 위해서.
여기는 벚꽃이 가장 먼저 피는 섬. 완연한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기쁨을 맞이하기 전, 동굴에서의 마지막 날을 만끽해야지.
56일 차
돌 틈 꽃
이 동네 산책길은 유채꽃 파종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시에서 관리한다. 하지만 길가가 아니라 바위 해안에서 자라는 꽃들은 우연히 피어난 것이다. 파종할 때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든 바람을 타고 안착하게 되었든 돌 틈에 어찌어찌 뿌리를 내렸을 꽃이 풍성하게 자란 모습을 보면 왜인지 먹먹하다.
시작부터 버티기인 삶. 우연히 떨어진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버티고 또 버티는 그런 삶.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척박한 바위틈에서, 그것도 소금기 가득한 해안에서 물과 양분을 얻어내야 하는 생명이라니.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꿋꿋이 피어난 생명은 바다와 땅과 하늘이 앞다투어 키우려다 결국 혼자 힘으로 자라나게 된 아이 같다. 적절하지 못한 사랑 속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는 돌 틈의 유채꽃이 버티고 버티며 홀로서기하는 단단함을 품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면서도 빗물과 햇빛과 바람 속에 피어난 생명이 한없이 경이롭다.
나비 해안
가끔은 무엇인가를 찾아 집을 나서기도 한다. 어느새 익숙해진 바닷가이지만 지나간 풍경을 다시 볼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 속의 풍경은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기억 속 풍경을 좇아 찾아 나설 때면 그날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동시에 자유분방하다.
길을 따르다 나비를 발견하고 걸음을 돌린다. 살금살금 다가가다 재빠른 날갯짓을 쫓아 다시 엇박자로 내 그림자를 밟는다. 목표를 두고 벌어지는 신중함과 우왕좌왕하는 걸음의 부조화는 서투른 춤과 같다.
검은 해안에 하얗게 그려지는 궤적을 쫓아 길 위를 맴도는 내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 머무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늘 작아졌던 예전의 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더 외로웠다. 책상 앞에 굳어버린 몸을 관절 하나하나,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움직이는 춤꾼이 되고 싶었지만 타고나길 몸치인 나를 보고 누구라도 비웃을까봐 춤 학원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었지. 거울을 보면 깨트려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 누군가의 시선이 거울 속 나의 시선을 빌려 비수처럼 꽂혔다. 한 번도 TV 속 연예인처럼 날씬해본 적이 없는 몸에 대한 미움과 열등감은 너무 깊이 곪아 있었다.
그렇기에 전신 거울이 없고 바다가 비추는 건 오직 하늘뿐인 이곳이 편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알아볼 수도 없는 이곳에서 내 시선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나는 움직이는 나를 보는 대신 움직이는 나를 느낀다.
훌쩍 떠날 수 있기에 완벽하지 않은 내가 무섭지 않은 그런 날들. 우아한 나비를 따라 얼렁뚱땅 탭댄스를 추는 몸치여도 괜찮은 그런 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