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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61-63일 차 : 색색의 환대, 굴러온 새순

늙은 왕벚나무,기원의 이름 청명,체화,리드미컬한 지구력,거리와 소리

61일 차


늙은 왕벚나무


한라산 등지에 자생하는 왕벚나무는 한국의 재래종이다. 평화로에는 크고 두꺼운 고목들이 줄지어 있는데 늙었지만 힘차게 큰 벚꽃을 피어내는 왕벚나무들의 활력이 어마어마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꽃을 피우고 떨어트리고 열매를 맺기를 반복해온 나무의 나이테에는 어떤 이야기가 새겨져 있을까? 우리가 매년 돌아오는 봄을 또 사랑하고 즐기듯 나무도 매년 피워내는 꽃을 지겹거나 뻔한 것으로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나무가 꽃을 피우고 떨구기를 반복하는지, 매년 어떤 다른 경험을 하며 그 자리에서 가지를 흔드는지, 다 나이테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올해는 비가 충분히 내려주었다, 그런 내용이라도.


아마도 어제가 올해 나의 마지막 벚꽃 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주도는 벚꽃이 빨리 피고 지니까, 특히 서귀포는 더더욱. 내가 돌아갈 때쯤이면 집앞의 아름다운 벚꽃 축제도 끝난지 오래겠지. 가장 먼저 핀 벚꽃을 구경했고 흩날리는 꽃잎 하나는 내 손바닥에 잠시 머물렀다. 언제나처럼 나에게 의지와 인연을 달라는 소원을 빌고 후 하고 불어 다시 날려 보냈다. 잡아두지 않고 보내주어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이곳의 바람에게 배운 기원의 방식이다.



기원의 이름, 청명


이 섬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흐르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일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은 못해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바와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썰물, 밀물, 만조 때의 수위 변화를 가늠하거나 예측하지는 못해도 이미 일어난 변화를 매일매일 시시각각 헤아려보며 계절이 바뀌어가는 흐름 자체를 음미하는 그런 순간들. 조금씩 달라진 해의 등장 시간이나 위치를 감지하고 사소한 변화와 이동을 관찰하며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런 관심.


또는 한참로, 색달로 엉덩물계곡, 예래로, 산방로 등등의 이름들을 곱씹기. 어떤 의미와 이야기를, 혹은 어떤 명소를 담아낸 이름인지 궁금한 도로명주소 간판을 살펴보고 입속에 한 번 굴려보면 별 이유 없이 재미있다. 굵직굵직한 것 외엔 잘 몰랐던 절기와 날씨를 견주어보면 하루가 새롭기도 하다.


오늘은 청명. 말 그대로 하늘이 맑아지는 절기다. 건조해서 화재에 대비해야 하는 때이자 봄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라고 한다. 어제보다는 구름이 있고 쌀쌀하지만 그래도 쾌적한 날이다. 올해 풍작과 풍어가 약속되기를 바란다. 절기는 기원의 이름이다. 또한 자연을 대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끝없이 펼쳐진 맑은 하늘처럼 많은 진척이 있기를.






62일 차


체화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나를 향한 철학적 난제라면 몸과 마음에 대한 물음은 세상을 향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철학적 난제 아닐까? 몸과 마음의 연결은 이 거대한 세상과 너무 작은 내가 뒤섞이는 시작점이니.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알람 없이 눈을 뜰 때 몸이라는 퍼즐 조각과 마음이라는 조각이 딱 맞물리는 듯하다. 약속한 것처럼 시간에 맞춰 눈을 뜨고 그럴 때면 게으른 나도 몸을 벌떡 일으킨다. 달리러 나가기 위해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공복 운동에 취약한 몸을 위해 어둠 속에서 시리얼을 먹고 굳은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준비운동을 한다. 일련의 과정은 하고 싶다는 마음, 의지가 몸에 스며들고 몸이 그에 부응해주어 가능한 일이다.

의지가 몸에 닿는 순간. 마음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디까지가 내 몸인지도 알 수 없지만 뭔가 통하는구나, 무언가가 체화되었구나 하는 순간, 꽁꽁 숨겨져 있던 나의 마음과 욕망이 온몸 구석구석을 깨우며 세상을 향해 피어난다.



리드미컬한 지구력


10분을 뛰고서 생각했다. 와, 다음 달리기는 더 긴데 어떡하지? 그리고 다음 달리기 구간을 딱 절반 뛰었을 때는, 와, 이만큼 더 달릴 수 있을까? 그 순간에 맞춰 흘러나오는 마지막 두 곡은 달리기에 가장 잘 어울려서 전주부터 신이 난다. 걱정을 넣어두고 끝을 향한 새로운 달리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분명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호흡은 안정되고 온몸이 일정한 리듬으로 땅을 딛고 밀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좀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힘든데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질이 급하고 그런 주제에 과하게 신중해서 내적 갈등이 심한 나인데,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딱 시작하고 쉼 없이 몰아붙이면 누구보다도 잘 참고 견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만큼 해온 게 보여서 분에 넘치는 인내력이 지구력으로 전환된다. 웃음이 나온다. 그냥 버티는 건 지구력이 아니라 인내일 뿐이다. 무언가를 계속하게 하고 다음을 있게 하는 건 지구력, 반복이 만들어온 일정한 리듬이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고 얼굴이 땀에 젖은 것도 모른 채 열기와 바람의 만남을 즐기다 보면 또 완주해낸 내가 있다.



색색의 환대

이 마을에 머무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범섬 앞인 것도 몰랐고 유채꽃이 만발한 동네인 줄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 섬이 유채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제주도를 그토록 좋아했음에도 나에게 유채꽃만큼은 할머니댁 근처인 낙동강변의 풍경으로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유채꽃의 노오란 빛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늘 이방인처럼 겉돌던 나에게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갖는 건 살아남는 법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어디 두어도 노란빛을 볼 수 있도록 방을 꾸미고 크고 작은 생필품들을 노란색으로 채웠던 건 어떻게든 어딘가에 속하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였다. 정말 몸만 있어도 노란색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그 취향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어디서나 노란빛에 감싸여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노란색이 들어간 옷이나 장신구를 사모으면서 많은 것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마음들이 그런 나를 알아봐주고 지지하듯 노란 선물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 선물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모른다.


그러니 그 어느 때보다도 휴식과 위로가 필요할 때, 잔뜩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끌고 대책 없이 찾아온 곳에서 만발한 유채꽃을 본 내 기분이 어떠했을까.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을 소개해준 아빠도 몰랐을 테지. 그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 아름다운 섬으로부터, 이 바다로부터 환대받고 위로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푸른 바다와 검은 바위, 노란 유채꽃이라는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 조합이 나를 매일 아침 맞아줄 거란 사실이 내가 이 낯선 해안을 단숨에 사랑하게 만들었다. 유채꽃이 지더라도 계속해서 사랑할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나는 환대받았다. 여기에서는 얼마든지 어디에든 겁 없이 걸터앉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안정감과 벅차오름이 앞으로 노란빛을 볼 때마다 떠오르겠지.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살아갈 힘을, 빛을 얻었다.




63일 차


거리와 소리


새들은 조금만 다가가면 날아가버린다. 배염줄이에 새들이 모여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도시의 비둘기는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 살아가기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자리를 뜨지 않지만, 자연의 새들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자신을 향하지 않는 발걸음, 말소리, 그림자의 변화에도 날아오른다. 어떤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듯이 이 바위에서 조금 뒤의 저 바위로, 그 뒤의 바위로 자리를 옮기는 새를 보면 미안해서 그냥 내 길을 가는 것뿐인데도 잠시 멈추고 다가가지 않게 된다.

그런 새들의 민감함과는 반대로, 나는 온갖 자연의 소리들로 가득한 이곳이 편하다. 경계할 필요가 없는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면, 내가 한심하게 뛰어들어 방해하거나 거스르지만 않으면 다 괜찮은 그런 소란. 반면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가 피해야 하고 돌아가야 하는 위험 신호였다. 거리를 둘만큼의 공간도 없고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알아서 피해야 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도 나는 잘 살겠지만 다른 소리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분명히.



굴러온 새순


지난 두 달 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유채꽃이 시들어가기 때문인지 지난주부터 시에서는 해안공원과 올레길의 꽃밭을 재정비하고 있다. 제멋대로 막 자란 풀들을 잡초로 판단해 솎아내고 땅을 파 선인장이나 다른 꽃나무를 심었다. 그 가운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꽃나무들도 올레길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2주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동안 연둣빛 새순이 점차 꽃봉오리의 형태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봐왔다. 봉오리가 생각보다 천천히 돋고 있어 언제쯤 꽃이 필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저 꽃이 피는 동안 유채꽃은 비바람에도 버텨낸 두 달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스러질 테지.


그러나 노란 꽃들이 진 자리에는 건물도 뒤흔드는 풍랑을 견딘 줄기가 더 단단하고 싱그러운 색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줄기들을 시에서 그대로 남겨둘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남겨두길 바란다. 굴러온 새순이 박힌 줄기를 몰아내지는 않기를. 새로 돋는 꽃가지와 진한 녹빛 유채 줄기는 정말로 잘 어울리니까. 겨울을 지나온 그 단단한 의미가 오래도록 이 해안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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