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 차 : 폐허, 풍속, 수면 아래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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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바위들 위에 올라서면 폐허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흐린 날씨 탓에 보다 창백한 바위들, 말라버린 이끼, 최근 수위가 높지 않다 보니 드러난 지 오래된 바위틈에서는 공기의 습기와는 무관하게 하루살이조차 발견되지 않아 더욱 폐허 같다.


잠겨 있거나 젖어 있을 때는 두려워 오를 수 없었던 장소에 발을 디디고 큰 새가 늘 머무르던 커다란 바위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았다. 나는 오를 수가 없는 거대한 바위. 바다가 깊어지면 새는 다시 이 바위 위로 돌아올 테지. 사람들이 바닷물에 뒷걸음질 치면 새들이 그 자리로 찾아온다. 사람들에게 잊힌 땅은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다가갔다가 물러섰다가 하는 땅이야말로 그 반복 속에서 점점 황폐해지는 게 아닌지. 그럼에도 새들은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다시 찾아와 생명력을 빛낸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반복 속에서 일렁이는 자연은 늘 아름답다.



풍속


잔뜩 흐리더니 결국 폭우가 내린다. 예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나는 방에 혼자 있었고 갑작스러운 폭우에 창을 닫았다. 책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디찬 창에 이마를 대고 빗속에 누워 잠드는 상상을 했다. 깨어날 날을 정하지 않은 그런 편안하고 깊은 잠을 위해 가지런히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저 아래 풀밭에 안착하기를.

무서웠다. 너무나 평안해서 더 무서운 상상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선 안 될 생각을 해버린 그날, 나는 스스로가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살고 싶어졌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불안한 그런 날들을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저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날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를 하진 못했지만 무슨 일이냐는 메시지를 받고서 조금 진정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이젠 괜찮다는 답을 보내고 다급하게 학교 상담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상담을 신청했다. 가능하면 선생님께 다시 상담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다행히도 그날의 나는 물리적으로는 혼자였지만 도움의 손길이 도처에 있었고 그 손길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지냈던 2주 정도의 시간, 그리고 진정하는 데 필요했던 다음 2주의 시간. 나는 2주일에 한 번 방문해도 될지 물었던 바로 전의 방문이 무색하게 바로 다시 매주 병원을 다니기로 했고, 약이 늘었고, 다시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J언니에게 휴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분명한 선언이었고 우울증에 대항함에 있어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투병 방법이었다. 버티는 것 외의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방에 혼자 있고 몰아치는 비바람에 창을 굳게 닫았다. 서늘한 창에 이마를 대고 흔들리는 가지를 따라 풍속을 헤아려보았다. 그날과 달리 오늘 나는 한껏 게을렀고 이 방에는 책상이 없고 나는 가끔 안 먹던 콜라도 마신다. 비스듬하게 서서 방안까지 스며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더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 지나간 날이 되어가고 있다. 길고 길었던 투병기가 일종의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있다.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수면 아래


방에 가득 찬 바람 소리, 빗소리. 바닷가라 그런지 수풀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도 파도소리를 닮았다. 그래서 꼭 내가 커다란 수조 속에 있는 듯하다. 수면(睡眠) 아래 들지는 못했지만 수면(水面) 아래에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거대로 좋지 않을까. 폭풍 한가운데서 혼자 지새우는 밤은 무서울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바람소리가 자꾸만 물결소리로 들리고 창 너머로 일렁이는 작은 빛들도 수면 아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안락하고도 거친 어머니의 품속 같다.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런 어머니. 내가 정연희 작가의 소설에서 발견했던, 양가적이고 욕망으로 요동치는 괴물적인 어머니라는 공간 한가운데 홀로 또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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