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일 차 : 돌 틈 꽃, 나비 해안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돌 틈 꽃

이 동네 산책길은 유채꽃 파종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시에서 관리한다. 하지만 길가가 아니라 바위 해안에서 자라는 꽃들은 우연히 피어난 것이다. 파종할 때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든 바람을 타고 안착하게 되었든 돌 틈에 어찌어찌 뿌리를 내렸을 꽃이 풍성하게 자란 모습을 보면 왜인지 먹먹하다.


시작부터 버티기인 삶. 우연히 떨어진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버티고 또 버티는 그런 삶.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척박한 바위틈에서, 그것도 소금기 가득한 해안에서 물과 양분을 얻어내야 하는 생명이라니.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꿋꿋이 피어난 생명은 바다와 땅과 하늘이 앞다투어 키우려다 결국 혼자 힘으로 자라나게 된 아이 같다. 적절하지 못한 사랑 속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는 돌 틈의 유채꽃이 버티고 버티며 홀로서기하는 단단함을 품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면서도 빗물과 햇빛과 바람 속에 피어난 생명이 한없이 경이롭다.



나비 해안


가끔은 무엇인가를 찾아 집을 나서기도 한다. 어느새 익숙해진 바닷가이지만 지나간 풍경을 다시 볼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 속의 풍경은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기억 속 풍경을 좇아 찾아 나설 때면 그날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동시에 자유분방하다.

길을 따르다 나비를 발견하고 걸음을 돌린다. 살금살금 다가가다 재빠른 날갯짓을 쫓아 다시 엇박자로 내 그림자를 밟는다. 목표를 두고 벌어지는 신중함과 우왕좌왕하는 걸음의 부조화는 서투른 춤과 같다.


검은 해안에 하얗게 그려지는 궤적을 쫓아 길 위를 맴도는 내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이방인으로 머무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늘 작아졌던 예전의 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더 외로웠다. 책상 앞에 굳어버린 몸을 관절 하나하나,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움직이는 춤꾼이 되고 싶었지만 타고나길 몸치인 나를 보고 누구라도 비웃을까봐 춤 학원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었지. 거울을 보면 깨트려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혼자 있을 때조차 누군가의 시선이 거울 속 나의 시선을 빌려 비수처럼 꽂혔다. 한 번도 TV 속 연예인처럼 날씬해본 적이 없는 몸에 대한 미움과 열등감은 너무 깊이 곪아 있었다.

그렇기에 전신 거울이 없고 바다가 비추는 건 오직 하늘뿐인 이곳이 편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알아볼 수도 없는 이곳에서 내 시선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나는 움직이는 나를 보는 대신 움직이는 나를 느낀다.


훌쩍 떠날 수 있기에 완벽하지 않은 내가 무섭지 않은 그런 날들. 우아한 나비를 따라 얼렁뚱땅 탭댄스를 추는 몸치여도 괜찮은 그런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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