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아침 기도
커튼을 걷었는데 오늘따라 모든 것이 선명해서 창에 이마를 대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세어보았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침부터 날이 맑아 그런 모양이다. 한동안 잔뜩 흐렸는데 드디어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몇 해 전 그날의 날씨는 어땠더라. 평범한 날이었고 전공 수업이 많아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모바일로 기사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서 하루를 보내다가 동기들과 함께 정문을 향해 걷는데 모두가 그 얘기뿐이었다. 하지만 다 구조했다던데? 다행이야, 다행이다. 안도감이 밀려들었고 우리는 비슷한 교통수단에서의 대규모 사고로 기억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나 문자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우리는 몰랐다. 그날의 재난과 악의적인 오보가 우리 모두의 삶에 커다란 흉터를 남길, 애도할 수 없는 긴 시간의 시작이었다는 걸. 무지했고 안일했던 그런 안도감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솜털 같이 옅은 구름을 올려다보다 충동적으로 기도를 했다.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엎드린 채로, 남겨진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남겨진 사람들의 탓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죄가 없습니다. 그렇게만 기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던 순간들이 죄책감이 되지 않았야 한다. 몇 년을 이뤄지지 못한 그 소망을 또 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이 져야 하는 죄의 무게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들이 대신 지는 일이 반복되는 세상이 아닐 수 있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기도를 했다. 이 맑고 푸른 아침에.
소금 바람
바닷가의 식물은 염분 섞인 바람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많은 식물들이 잘 자라다가도 바람이 강하게 불면 염분에 절여져서 갈색으로 말라버린다. 새로 뿌리를 내리기도 쉽지가 않다. 좀 자리 잡을만하면 바람이 불어 넘어지고 좀 익숙해질 만하면 드러난 뿌리가 염분에 말라간다. 겉보기에는 온갖 식물들이 잘 자라는 아름답고 기름진 땅 같겠지만 제주도를 이만큼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다 싶다. 자생하는 식물 외에도 너무 많은 식물들이 이 섬에 뿌리내리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욕심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바람에 쓰러진 관목들의 드러난 뿌리가 주홍빛으로 바래는 것을 며칠 동안 지켜보았다. 자연과 시간은 어떨 때는 참 가혹하구나. 하지만 또 그 관목들이 한창 꽃을 피울 때는 비바람을 거뜬히 견뎠던 터라 다 순리이고 자연스러운 거구나, 하는 그런 양가적인 생각도 든다.
건조함과 찬 공기, 뜨거운 볕에 익숙해진 내 그을린 피부도 염분 섞인 습기는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한창때가 저물어가는지도 모른다.
조용한 고백
저녁임에도 어둠이 짙게 내린 서귀포 깡촌으로 친구가 찾아왔다. 먼 길을 와주었다. 이 시간에 벌써 어둡냐며 신기해하는 친구에게 오늘은 달빛이 들어 많이 밝은 편이라고 하는 내가 우스웠다. 시골의 이른 밤에 익숙해져 버렸다. 마주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술을 찾는 친구에게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가 왜?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꼭 장난을 꾸미다 들킨 아이처럼 조금 수줍게 아팠다고 말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울과 불안, 투병의 나날에 대해 고백했다. 정말로 무언가를 고백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었고 같이 화도 내고 공감도 하며 밤이 저물었다.
그때 나는 다 괜찮아지고 있다고, 이제 거의 괜찮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냐는 다정한 말에 그냥 웃었다. 만나자마자 바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이제는 웃고 즐겁게 보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지금은 잘 되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