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n in August
한여름이 되면 찰옥수수를 먹어야 해요. 먹는 행위는 한국인에게 엄청 중요하잖아요. 안부인사 대신 밥은 먹었니, 멀쩡한 생산활동을 하고 있냐는 뜻의 밥값은 하니, 재수 없다는 말 대신 너 정말 밥맛없네 같은 우리네 표현은 잠깐 미뤄두고요. 한국인은 진짜로 먹는 게 중요하다니까요? 삼겹살과 감자탕과 즉석 떡볶이와 닭갈비를 먹고 난 뒤에 볶음밥을 하나만 볶을지 두 개만 볶을지 치즈를 추가할지 날치알을 추가할지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정말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이에요. 떡볶이에 라면사리를 추가하고 국물에 김밥을 찍어먹는 걸 보면, 글루텐 프리(free)? 건강을 위해서 마음 한 구석에 새겨두고는 있지만 몸이 원하는 건 글루텐 온리(only) 식단이거든요.
한국의 장점이 뭔지 알아요? 김치요? 빠른 인터넷이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요? 아.. 다 맞긴 한데... 물론 다 자랑스럽긴 한데... 제 의도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네요. 저는 사계절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철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굉장한 장점이죠? 봄에는 식탁에서 딸기, 여름에는 마루에서 수박, 가을에는 싱크대에서 연시, 겨울에는 이불속에서 감귤. 제철음식은 잊지 말고 먹어야 해요. 해수면은 점점 오르고 해변은 점점 깎이고, 북극곰은 얼음이 녹아 질척한 땅 위의 어느 폐가에 살고 있고, 여름은 빨리 오고 겨울은 빨리 사라지면서 제철이라는 게 사라지고 있거든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딸기와 복숭아를 더 먹을 수 있을지 몰라요. 재배기술이 좋아져서 한겨울에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만 제철음식은 제철에 먹어야 해요. 먹는 데에 분위기와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12월에 누가 수박 먹는 상상을 하나요? 청량한 여름 하늘 아래에 과즙을 뚝뚝 흘리면서 먹어야 수박을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붕어빵은 한겨울에 트럭을 발견하면 달려가서 오늘만을 위해 갖고 다닌 주머니 속의 꼬깃한 현금으로 사 먹잖아요. 계좌이체해서 먹으면 길거리음식을 먹는 분위기가 안 나요. 팥붕이냐, 슈붕이냐 물으신다면, 팥 두 개에 슈크림 한 개의 비율을 좋아해요.
시공간이 음식의 맛을 얼마나 좌우하는지 조금은 감이 오시나요? 추억의 음식을 찾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그때 그 맛이 안 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추억의 음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추억의 음식은 떡꼬치예요. 제가 학교에서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배울 무렵, 동네에는 아파트마다 요일장이 섰었어요. 금요일마다 서는 아파트장의 분식 포장마차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폐장시간이 되면 사장님이 오뎅국물이랑 떡볶이를 막 퍼주셨거든요. 특히 금요일이라 어차피 다 버리는 음식이 된다면서 한 번은 떡꼬치를 잔뜩 주셨었어요. 후라이팬에 기름 자작하게 둘러서 튀기듯 구우면 똑같은 맛이 날 거라고. 용돈 모아서 사 먹고, 아껴먹는 떡꼬치였는데, 오늘은 떡꼬치를 실컷 먹을 수 있겠다! 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때는 마침 엄마랑 할머니댁에 가는 날이었거든요. 할머니의 부엌에서 떡꼬치를 잔뜩 해다가 사촌들과 같이 먹었는데 아직도 기억해요. 진짜 맛있었어요.
어른이 되면 분식 포장마차에서 "사장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떡꼬치는 열 개 주세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분식 포장마차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어요. 제가 근의 공식을 외울 때쯤에 사장님이 암에 걸리셔서, 분식 포장마차는 다른 업체로 바뀌었거든요.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상인회와 아파트 사이의 갈등으로 요일장도 사라졌어요. 사장님은 이제는 안 아프실까요? 하나에 300원 하던 떡꼬치는 얼마가 됐을까요? 어쩌면 영영 사라졌을 수도 있어요. 피카츄돈가스는 이제 저작권 때문에 곰돌이 모양이 됐고, 떡꼬치는 더 이상 성분도 알 수 없는 밀떡 대여섯 개를 수평으로 꽂은 걸 칭하는 말이 아니라 통가래떡 한 줄을 꼬치에 꽂아 튀긴 걸 뜻하게 됐거든요.
우리가 더 계절을 잃기 전에, 제철을 즐겨야 해요.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누군가 그랬잖아요. 그래서 7월만 되면 청포도가 생각나더라고요. 떡볶이가 더 이상 초록색 멜라민 접시가 아니라 스텐 냄비에 나오게 됐을 때, 이제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자취방 문 앞까지 오게 된 무렵에, 자주 가던 분식집에는 떡볶이 2인분에 에이드를 선택할 수 있는 세트 메뉴가 있었어요. 자몽 에이드, 청포도 에이드, 레몬 에이드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뭘 먹겠냐는 애인의 질문에 나는 “자기 먹고 싶은 걸로 해. 근데 자기야,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인 거 알아?”라고 말했어요. 그럼 걔는 청포도 에이드를 주문해 줬어요. 다음에 카페에 갔는데 걔가 청포도타르트를 보더니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래"하고 속삭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에 청포도 타르트도 주세요."하고 주문했어요.
걔 정말 웃겼어요.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만날 때마다 파인다이닝 이런 곳만 가려고 했어요. 파스타에 스테이크에 와인까지. 펜네, 리가토니, 뇨끼, 페투치네, 링귀니... 파스타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 지도 처음 알았어요. 까르보나라가 원래 크림파스타가 아닌 거 알아요? 계란노른자에 치즈랑 후추를 섞은 소스에 파스타를 함께 버무려 만드는 게 원래 까르보나라래요. 난 그것도 걔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이탈리아 사람이었냐고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청포도 타르트를 먹었으니 아니에요. 걔 자취방에서 팬에 스파게티 반으로 부러뜨려 삶으니 절규하는 걸 듣긴 했지만요. 그렇게 많은 파인다이닝을 갔어도 나는 여전히 어떤 커틀러리를 언제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요. 내가 한 일은 앞접시에 걔가 덜어주는 음식을 포크로 찍어먹는 게 다였거든요. 한 번은 이름 모를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에 알차게 볶음밥까지 볶아 먹었는데, 어떤 레스토랑에 갔을 때보다도 내가 너무 행복해해서 속상했다나? 그 이후로 국밥집이나 포장마차도 서슴없이 갈 수 있게 돼서 좋았어요.
아무튼, 7월에 청포도가 익어간다는 말을 방송 작가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 7월만 되면 라디오에서 티비에서 유튜브에서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죠?’라면서 물꼬를 텄거든요.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꼭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를 틀어주고요. 어떤 계절만 되면 생각나는 글과 노래가 있잖아요. 이 세상에 봄이 사라진다고 해도, 연인들은 ‘벚꽃 엔딩’을 들으면서 데이트할 것 같지 않아요?
아무튼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어요. 기왕이면 8월의 옥수수 같은 글. 옥수수 좋아해요? 저는 사랑해요. 사랑하는 음식들이 꽤 많긴 한데..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에 더 가까워요. 옥수수빵도 좋아하고, 옥수수수염차도 좋아하고, 콘치즈도 좋아하고, 콘플레이크도 좋아해요. 옥수수를 눌러서 만든 시리얼이요. '콘푸로스트'와 '콘푸라이트'가 있잖아요. 하나는 ㅋ사의 것 하나는 ㅍ사의 것. ㅋ사의 '콘푸로스트'는 고향에서 'frosted flakes(서리가 내린 얇은 조각)'라는 이름으로 파는 거 아세요? 콘플레이크 위에 설탕을 코팅했는데 그게 마치 서리 덮인 것 같잖아요. 그게 한국에 들어오면서 호랑이 기운이 쑥쑥 나는 '콘푸로스트(corn frost)'가 된 것 같아요. ㅍ사의 '콘푸라이트'가 제법 웃겨요. 얘도 납작하게 눌러 만든 옥수수 조각 시리얼에 설탕을 코팅해서 만든 시리얼인데, 먼저 들어온 '콘푸로스트'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비슷한 이름을 지은 것 같아요. 프로스트가 상표니까 비슷한 발음의 다른 단어를 찾아 이름 붙였을 거예요. 그래서 '콘푸라이트'가 뭐냐면요, 'corn flight(옥수수 비행)'인 거 아세요? 어느 날 시리얼 박스를 보고 한참을 웃었기 때문에 기억해요. 나라면 시리얼 포장지에 비행하는 사자의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콘푸로스트'는 호랑이 기운이 나지만, 우리는 진짜로 난다~ 이런 느낌으로요. 개인적으로 콘플레이크 중에는 '콘푸라이트'가 더 바삭해서 좋아하거든요.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이렇게 가공되어 형체가 사라진 옥수수들 말고요. 껍질을 까고 수염도 뽑아야 하는 옥수수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한여름에 옥수수가 영글 때 기꺼이 땡볕 아래에서 옥수수를 수확하고, 뜨거운 불로 옥수수를 찌잖아요. 더위에 지쳐서 입맛을 잃었을 때도 옥수수는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거 알아요? 야근하고 돌아와서 아무것도 먹을 생각 없었는데, 냉장고 속 옥수수를 발견하고는 '하나만 먹어야지'하고 하나만 꺼내서 레인지에 덥혀 먹었는데 그날 결국 한 봉지 다 먹었잖아요, 나. 아무튼 8월의 옥수수를 먹을 때 생각나는 그런 글. 누군가의 한여름에 생각날 그런 글. 가장 뜨겁고 더운 날에 두고두고 생각나는 그런 글. 그런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근데 내가 쓰는 글은 시시콜콜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내리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들을 한 데 모아 끓여내는 잡탕에 가까워요. 8월의 옥수수는 동경에 가까운 목표였죠.
몸에 옥수수를 새기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어요. 몸에 새길만한 예쁜 꽃이랑 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서도 옥수수를 몸에 새기겠다는 거예요. '장미나 매화나무, 소나무도 아니고 굳이 옥수수?'라고 할 처지는 못 돼요. 나는 콕 집어서 8월의 옥수수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이니까. 근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옥수수만 보면 그가 생각나요. 나보고 따뜻한 라떼 같다면서, 비가 오는 날 유독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랬거든요.
망했어요. 가장 더운 날에 기꺼이 생각날 글은 못 쓰고, 이제 더운 날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생긴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가장 뜨겁고 더운 날에 옥수수를 먹으면서 연락했어요. 다음 비가 오는 날에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