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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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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Aug 23. 2023

아메리카노가 아닌 무언가

Something That Is Not a Americano

카페에 가면 항상 아메리카노를 시켜요. 그만한 음료가 없거든요. 그냥 아메리카노가 아니고 아.아. -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고 하는 것을 좋아해요. 한국인이 왜 영하의 날씨에도 롱패딩을 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사는지 아세요? 왜냐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빨리 마실 수가 없잖아요. 마신다기보다는 한 모금씩 넘기는 것에 가깝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말 그대로 들이키는 거잖아요. 아메리카노를 빨리 마시면 카페인을 빨리 섭취할 수 있어요. 카페인을 빨리 몸에 돌게 해야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지 않나요?

농담이에요. 불쌍한 한국인들. 일을 위해서 카페인마저 빨리 섭취하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한다니. 한국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우물에서 물을 떠 마셨기 때문이래요. 중국이나 영국처럼 흙탕물이고 석회수가 흐르는 곳이라서 차를 넣고 펄펄 끓여 소독해서 마시는 곳과 다르게 우리는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바로 마실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한국인의 유전자에 시원한 것이 각인된 셈이죠. 애초에 냉면과 초계국수, 냉채족발, 화채, 콩국수, 묵사발, 김치말이국수, 빙수 등 이런 차가운 음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까닭도 우물이었던 거고요. 우물에서 바로 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이 냉면을 만들었다니!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단군이 부동산 사기당했다고 비꼬면서 말하지만 물만큼은 맑은 곳이에요. 지금도 수압이 중요하잖아요. 혹시 독립해서 집을 계약하게 되거든 화장실 수압은 꼭 확인하세요.


이어지는 내용인데 물이 맑아서 우리는 잎차보다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곡물들을 우려서 마셨대요. 굳이 차를 마시기 위해 잎차를 따로 잎차를 기르지는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인 보리, 결명자, 옥수수 같은 거요. 가마솥 저 바닥에 있는 누룽지에 물 넣고 숭늉으로 끓여 마시기도 하고요. 곡물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소하다 보니 한국인들은 커피를 마실 때도 산미 있는 원두보다는 고소한 향을 더 좋아하고 차라리 탄 맛이나 쓴맛 나는 커피를 선호한다고 해요.


아무튼 아메리카노는 누가 만들었는지, 대단한 음료예요. 이탈리아 같은 곳에 가면 어딜 감히 얼음물에 귀하신 에스프레소를 타 마시냐면서 통탄에 빠지겠지만. 한국의 더위를 겪는다면 두 팔 벌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예찬할걸요? 아.아.는 이를테면 21세기의 우물에서 퍼마시는 인스턴트 보리차 같은 거죠. 우물이 현대에 와서 카페로 바뀐 거고, 보리차는 고소한 원두를 쓰는 아메리카노가 된 거고요.


카페에서 보리차를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할머니네 집에 가면 보통 양동 주전자에 펄펄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둔 보리차가 항상 있어요. 보통은 델몬트 오렌지병에 담겨 있고. 진정한 할매니얼 음료는 흑임자나 인절미 같은 게 아니라 보리차라고 생각해요. 우리 할머니는 인절미도 흑임자도 그냥 그래~ 하신다고요. 도대체 왜 카페는 보리차를 팔지 않는 거죠? 아메리카노랑 같은 가격에 보리차를 팔면 나는 기꺼이 보리차를 살 것 같은데요. 인식이 너무 저렴해서 그런가? 고소하고 시원한데 카페인이 없는 향토 음료잖아요.


조금은 속상한 것 같기도 해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가 아닌 음료를 마시려면 너무 힘들어요. 왜냐하면,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시아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 아닌가요? “너무 달지 않아서 좋다”라고 하잖아요. 그냥 아메리카노를 여러 번 들이키라고요? 아니, 아메리카노를 많이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오고 가끔은 머리가 아프기도 해요. 그러니까 나는 카페를 좋아하지만 아메리카노를 여러 번 먹을 수는 없는 거예요. 대학생 시절에는 네 샷이고 다섯 샷이고 샷을 무한대로 추가할 수 있는 카페가 있었는데 그걸 마시고 밤새우고 시험을 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용케 카페인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 가지 않은 게 다행이죠. 지금은 하루에 아메리카노 세 잔, 네 잔 마시면 분명 카페인 쇼크로 요단강을 건너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카페에서 다양한 곡물차를 팔면 좋겠어요. 수요가 없지도 않을걸요? 편의점 가면 엄청 다양한 종류의 차를 취급하는 거 아세요? 헛개수에 결명자에 메밀에 누룽지에 옥수수수염까지.. 그걸 다 우린 17차 같은 것도 있다고요. 다양한 고소함을 담은 차를 팔면 좋겠어요. 속상해요. 왠지 우유를 섞어서 밀크티로 즐겨도 맛있을 것 같기도 해요. 고소하고 맛있지 않을까요?


얼음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액상과당은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아메리카노밖에 없는 거예요. 우유요? 저는 유당불내증이 있어요. 한국인의 대부분은 우습게도 유당불내증을 앓고 있답니다. 어쩔 땐 괜찮은데 어쩔 땐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해서 우유는 잘 안 마시는 것 같아요. 또 가끔 우유의 비릿한 냄새를 감추지 못하고 파는 카페들을 가면 화가 치밀어 올라요. 두유나 오트 밀크 같은 옵션으로 바꾸라고요? 오트 밀크 잘못 쓰면 가정통신문 먹는 것 같은 느낌 나는 거 아세요? 친환경 종이 빨대로 마신다면 완벽하죠. 사실 종이도 나무로 만드는 거니까 식물을 식물로 섭취하는 거라 채식하는 느낌이고 오히려 좋을 지도요. 비꼬는 거 맞아요. 정답입니다. 종이 빨대 쓰는 카페.. 좋죠.. 환경을 생각하고.. 근데 저는 종이맛 나는 음료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냥 두유를 팔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다음에 샷 빼고 두유만 넣어서 달라고 해볼까 봐요.

고마워요. 덕분에 정리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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