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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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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Aug 31. 2023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A Midsummer Christmas

나는 종종 외화로 미화된 추억들을 갖고 있다.

어딘가 볕이 잘 드는 넓고 좋은 곳에 예쁜 정원을 가꾸고 자수하는 취미를 가진, 갈 때마다 사과파이를 맛있게 구워서 주시는 할머니라든지(사과파이는 모 브랜드 명품가방처럼 격자무늬여야 함), 정원에는 나무집이 있어서 바비인형과 봉제인형들과 담요가 깔려있고 거기서 한나절을 보낸다든지, 도로변에 있는 다이닝에서 롤러 탄 웨이트리스가 주는 바나나스플릿을 퍼먹는다든지, 장을 보고 장바구니가 아닌 큰 종이봉투에 대파대신 바게트가 튀어나오게 짐을 싸서 품에 안고 돌아온다든지, 잔디밭에 누워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겹친 식빵과 사과를 먹는다든지, 그런 전 세계 이곳저곳의 문화와 전통이 섞여 있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환상이라고 해야 맞겠는데, 어딘가에서 아른거리는 추억.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들이 많다. 11월 말부터 트리를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생각하고, 트리 밑에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포장지로 정성스레 싼 선물상자들이 가득하고, 양말이 잔뜩 걸린 벽난로에 장작이 타들어가는 걸 보면서 마시멜로를 듬뿍 올린 핫초코를 마시고, 못생긴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입고 누구의 옷이 더 화려한지 뽐내고 있는데, 밖에는 눈이 잔뜩 쌓여있는. 아파트가 가득한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추억이 가득하다. 이건 다 '러브 액츄얼리'랑 '나 홀로 집에' 때문이다.


언젠가, 눈이 오는 길거리를 걸을 때,

"나는 늘 여름인 곳에 살다 와서, 눈이 오는 건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웠어." 

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하와이에도 크리스마스가 있어?' 하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어글리 스웨터나, 눈이 쌓인 창밖을 보며 마시는 마시멜로가 가득한 핫초코는 없지만, 하와이에도 크리스마스가 있다고 그랬다.


산타가 수영복을 입고 있을지 아니면 정체성인 선물보따리와 빨간 털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지 잠깐 생각하다가, 산타가 빨간 팬티를 입고 서핑하며 선물을 나눠주냐는 두 번째 이상한 질문을 했다.

서핑까지는 좋은 추측이었지만, 하와이에는 보통 굴뚝이 없으므로, 산타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문을 두드린다고 했다. 그곳의 산타는 현관에 눈발자국 대신 물발자국을 남기려나. 와이키키 해변의 모래를 샌들에 가득 묻혀 모래발자국을 남길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Mele Kalikimaka"라고 인사하며 칠면조 요리보다는 하와이안 음식이 더 흔하다고 했다. 커스터드를 가득 채운 말라사다 도넛에 코나커피를 마실지도 모르겠다. 


360일을 크리스마스만 기다리면서 일 년을 보낸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신나서 하와이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해줬더니 '내 크리스마스는 겨울 뿐이야'라며 사절하는 거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국산영화도 있잖아'하니까 '그건 그런 내용이 아니야!'하고 두 번 거절당했다. 나는 한여름의 언젠가를 우리끼리 크리스마스라고 정해서 기념하고 싶었다. 하와이 대신 제주도에 가서, 어글리 스웨터 콘테스트 대신 어글리 하와이안셔츠 콘테스트를 하고, 순록 대신 거북이와 돌고래가 끄는 서핑보드를 타고 집집마다 돌면서 문을 두드리는 산타를 그리고 뒷면에는 편지를 써서 선물과 함께 교환하는 상상을 했다. 해변에 가서 모래로 눈사람을 만들어 보고. 모래로 만들었으니 더 이상 눈사람이 아닐 텐데. 그럼 모래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야자수에 장식용 전구를 둘러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싶었다. 키가 크고 코코넛이 떨어지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런 위험한 나무 말고, 키가 작고 언뜻 보기에는 파인애플처럼 생긴 소철나무에.


올해는 제주도에 꽤 자주 갔었는데, 상상만 했다. 그러다 혼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일행이 왜 웃어?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며.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언젠가는 즐길 날이 오겠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빙수를 먹으면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싶어. 눈대신 파도에 묻혀보고, 마시멜로 띄운 핫초코대신 종이 파라솔이 꽂힌 칵테일을 마시는 그런 크리스마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게, 아무래도 한여름은 진작에 끝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내년을 기다려야지. 한국은 딱히 크리스마스 문화라고 할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 대신 눈이 와. 네가 좋아하는. 또, 울면 안 된다는 캐롤은 이제 울어도 된다는 가사로 바뀌어서 아이들이 불러. 좋은 변화지?"


눈사람이 훌라춤을 추고 펭귄이 하와이안 셔츠를 입는 꿈을 꿨다. 여름과 겨울이 섞인 뒤죽박죽 크리스마스. 지나간 여름을 다시 그리워하고,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는 무의식이 반영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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