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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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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08. 2023

여우와 호랑이 그리고 하늘

a Fox, a Tiger and the sky

맑은 날에 잠깐 비가 오다가 개는 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여우 시집가는 날' 그리고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하잖아. 왜 그렇게 부르는지 궁금해한 적 없어? 여우랑 호랑이가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어라? 그럼 여우는 호랑이한테 시집가고 호랑이는 여우한테 장가가는 건가? 아무튼 누군가 결혼하는데 왜 맑고 비가 오냐고. 맑은데 비 오고 결혼식도 있으면 우산을 써야 하는 건지 없어도 되는 건지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잖아.


옛날 옛날에, 아마도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이었을걸? 지금은 끊었나 모르겠네, 그때는 곰방대였고 지금은 줄담배로 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구미호가 되지 못한 여우가 산을 갖고 싶어서 호랑이에게 시집을 갔대나 봐. 구백구십구 번째 남자의 간을 빼먹은 뒤에, 산으로 도망치면서 구미호가 되기를 포기했을 거야. 앞으로 한 개의 간만 더 파먹으면 되는데,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100일간 더 버티는 것도, 더 이상 밤마다 도망가는 것도 싫고, 친구들이 몰살당하는 꼴도 보기 싫었겠지.


호랑이?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어. 이미 산은 지꺼고, 그 산이 갖고 싶어서 재능 많고 어린 여우가 제 발로 굴러들어 오겠다는데. 그러나 여우는 영원히 안주인이지 주인이 되지는 못할 텐데, 왜 그렇게 산을 갖고 싶어 했냐고? 이 땅에 내려와 살게 된 선녀를 기억해?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선녀를 도와주잖아. 근데 여우는 다 봤거든. 사슴이 나무꾼에게 선녀가 머물다 가는 곳을 알려준 것도, 나무꾼이 날개옷을 훔친 것도. 어쩌겠어, 나무꾼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데. 가끔 설거지도 하고 마당도 쓰는 착한 남편이래. 사실은 그 나무꾼이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말은 못 하고. 여우는 그 사슴을 죽이고 싶어 했어. 나무꾼도 같이 없애버리고 싶었는데, 나무꾼이 호랑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건 호랑이랑 결혼한 다음에나 알았다나. 진작 나무꾼의 간을 빼먹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하고 있어.


아, 그래서 결혼하는 날에 비는 왜 오냐고? 간단해. 하늘이 무척이나 여우를 사랑했대. 그래서 여우가 하루라도 빨리 구미호가 되어서, 가장 높은 산의 산신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자기랑 가까워지길 바라고 또 빌었대. 여우가 간을 빼서 산으로 도망갈 때마다 그 큰 보름달을 먹구름으로 가리기도 하고, 미처 숨지 못한 여우의 친구들은 안개로 숨겨주기도 하면서. 그런데 남몰래 사랑한 여우가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간다니 울지 않을 수 있어? 입도 무거워서 서동요처럼 '저 여우가 내 여우다! 저 여우 내가 찜했다!' 하지도 못했다고.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여우가 너무 안타까워. 산이 뭐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하늘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하늘이었으면, 폭풍을 부르고, 번개를 쏟아붓고 했을 거야. 그치지도 않는 비를 퍼부어서 호랑이가 산사태에 떠내려가게 했을 거야. 사람들이 '저기 원래 산이 있었다고?' 하게 만들겠지. 내가 갖지 못한다면, 아무도 갖지 못하게 망쳤을걸? 근데, 그러지 않았대. 오래 살아서 그런가 되게 성숙하다. 누군가가 주인공인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지 밝은 햇살을 보내고, 햇볕 뒤에서 남몰래 운다는 게 그만 손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 거야. 아름답게 꾸며주며 행복을 빌고 싶지만 슬픔은 주체할 수 없는 거지. 나는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하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너무 예쁘고 안타까운 이야기야. 끝끝내 행복한 이가 아무도 없는 이야기.


아, 호랑이는 행복할 거라고? 꼭 그렇지도 않아. 걘 꽤 멍청하거든. 호랑이는 그 뒤로 곶감한테 쫓겨보기도 하고, 팥죽 좀 먹어보려다가 입천장도 다 까지고 멍석에 말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오누이를 잡아먹겠다고 기름 바른 나무 위에 올라가려다가 썩은 동아줄을 잡아 떨어지고 그랬으니까. 아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지? 이게 또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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