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a man
그냥 그렇게 됐어요. 사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떻게 죽였냐고요? 대가리를 먼저 부수고 팔다리를 썰었는지, 팔다리를 자른 뒤에 대가리를 부쉈는지. 약 먹고 죽였는지, 술독이 올라서 죽은 건지. 만약 조각을 냈다면 아마 대가리를 먼저 부쉈을 것 같긴 해요. 팔다리를 먼저 썰면 아무래도 소리 질러서 머리가 아팠을 테니까요. 아닌가? 어차피 의식이 없었을 테니까 팔다리를 먼저 썰었으려나? 그런 건 부검하면 나오는 거 아니에요? 아, 시체를 먼저 찾아야겠구나? 그러게요, 몰라요. 산에 묻었는지 바다에 빠뜨렸는지. 산이 70%고 바다가 세 면을 두르고 있으니까 산도 바다도 열심히 한번 뒤져봐요. 요즘은 골프장 만든다고 산도 참 많이 밀잖아요. 골프장 짓는 현장에 가보면 발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겠어요?
아니, 반성한다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피가 가득했어요. 뭐, 양만 많아졌을 뿐이지 달마다 겪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역겹다거나 힘들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피에 익숙한 건 여성 아니에요? 공포영화 속 피와 살인에 익숙한 살인마 배역이 자꾸 남자한테 가더라고요. 걔네가 뭘 알아요?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피가 흥건한 살인현장에서 살인마가 "뭐, 매달 보던 피랑 크게 다르지도 않네"라고 하며 생리대로 뒤처리를 하는 영화를 만들 것 같아요. 생리대 써 봤어요? 흡수율 개같아요. 항상 흡수력테스트를 줄곧 물로 해왔대요. 피가 물보다 진한건 알지만 흡수력을 실험할 때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나 보죠? 그래서 생리대나 탐폰으로 피를 닦진 않았어요. 아, 렌즈세정제를 쓰면 피가 꽤 잘 빠져요. 과산화수소수나 베이킹 소다 같은 것도 자주 추천하던데, 어느 세월에 가루를 만들고 섞어서 피를 지워요. 락스는 냄새가 나잖아요. 그리고 락스를 다섯 통 여섯 통을 한꺼번에 사가면 사람들이 의심해요. 렌즈세정제 많이 사가면? 그냥 1+1 행사기간에 렌즈세정제 산 사람이죠. 마침 행사해서 짝수로 맞춰서 샀어요.
죽어 마땅한 놈이었어요.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아요? 죽어 마땅한 놈이다. 쟤는 죽었으면 좋겠다. 요즘 그런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저 녀석 꼭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누군가의 열망과 소원을 들어줬을 뿐이라고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 걸 알아요. 내가 아무나는 아닌가 보죠. 그도 죽고 싶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나는 정말로 소원을 들어준 지니였을 뿐인데요.
얼굴은 가려주실 거죠? 모자도 옷도 빌려주실 거죠? 검토하고 얼굴을 공개할지 말지 하던데. 살인이 처음인 초범이라 봐주시지 않으려나. 왜요? 이제서야 피해자에 이입돼요? 언젠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호신용품을 검색하고 싶고 그래요? 진짜 이상하다. 주방에서 칼을 드는 건 항상 여성이었잖아요. 주기적으로 칼을 가는 것도, 채소용과 육류용 도마를 구분해서 썰고 가는 것도. 자르고 다져서 주는 족족 끼니마다 감사한 마음도 없이 받아처먹기만했으면서. 그 안에 내가 뭘 넣었을 줄 알고.
나한테도 서사를 부여해 줘요. 그쪽이 잘하는 일이잖아요. 쉬운 일 아니었어요? 앞날이 창창한 청년, 우발적인 범죄, 반성중. 전혀 반성하지 않는 것 같다고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울면서 말해야 정상참작이 되나요? 뭐, 원하신다면 눈물 뽑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생각보다 더 편협하시네요. 어차피 줄글로 기록하실 거 아니에요? 죄송한 마음을 담아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진술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말해야 유리해요? 아, 악마 같은 저의 삶을 멈추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야 했나? 아, 그건 포토라인에 서서 해야 할 말이었나? 근데 악마 같은 삶도 아니지 않아요? 여럿도 아니고 고작 사람 하나 죽였을 뿐인데,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 아니에요? 반성하고 있는 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러게 누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래? 아니, 시체가 없으면 죽은 거라고 할 수 없지 않아요? 어디 한 번 찾아보세요. 그다음에 날 잡아 보시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