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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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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Aug 26. 2023

라하이나 눈

Lāhainā Noon


나는 삶의 가벼움을 알아. 18살이 되던 해의 만우절 아침, 거짓말처럼 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 등굣길에 덤프트럭이 네 머리를 으깨고 사라졌어.


우리 정말 중요한 삶만 살았잖아. 영유아기 때부터 교복을 입은 지금까지 인생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고등학교 2학년은 정말 중요한 시기래. 입시가 목숨보다 무겁나 봐. 산 사람은 살아서 대학에 가야지. 합격률을 높여야 하지 않겠니. 어쩌면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살아남은 나는 수업을 듣고 대학에 갔어야 했으니까.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출결도, 학습 진도도 중요하니까. 종례까지 끝나고 나서야, 짐을 다 싸서 야간 자율 학습실로 이동하려는데 그제야 담임이 조용히 날 불러서 말해주는 거야.

택시를 잡으면서도, 장례식장에 내리면서도, 육개장을 뜨고 떡을 집어 먹으면서도 다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네 영정 사진도 거짓말 같았어. 너는 학생증 보여주기를 죽기보다 싫어해서, 학생증에 얼굴 부분만 마커로 까맣게 칠해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그 위에 반짝이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애였잖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급식을 받기 위해 학생증을 꺼내야 하면 항상 이따위로 찍은 그 사진관을 욕하던 애였어. 그렇게 보여주기 싫어하던 사진이 거짓말처럼 모두가 보는 영정 사진이 됐네.


너의 죽음은 거짓말 같았는데, 남은 나의 삶은 현실이라서 사는 게 벅찼어. 네 삶은 너무 가벼워서 여기저기에 쉽게 오르내렸거든. 그건 꽤 버티기 힘들었어.

"8반에 걔, 덤프트럭에 죽었다며?"

"헐, 불쌍해서 어떡해?"

"공부 꽤 잘하는 애였으니까, 앞으로 내신 따기는 쉬워졌을지도?"

"미친 ㅋㅋㅋ 사람이 죽었는데 할 소리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맞는 말이잖아."

"아 근데, 트럭에 깔린 거면 시체는 어떡해? 머리가 깨졌다며?"

"몰라, 나 아는 사람이 그러는데, 그렇게 알아볼 수 없는 시체는 붕어빵 틀 같은 데에다가 반죽 같은 걸 넣고 생전 얼굴 비슷하게 만든다나 봐. 그렇게 해서 장례식에 쓴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와, 그렇게까지 한다고? 끔찍해"

왜 네가 그렇게 쉽게 갔는지 모르겠어. 가볍게 쉽게 빨리 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여름날, 돌아가면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던 밤이 생각나. 나는 발코니에서 매일 밤 춤추던 여성이 사실은 목매달아 죽어서 밤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체였다는 이야기를 했어. 너는 어느 마을 이야기를 들려줬어.



옛날 옛날, 일곱 개의 숲과 일곱 개의 산을 지나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샘이 마르지 않고, 꽃이 지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어느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암흑을 두른 상인이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상인은 피처럼 붉은 낙타와 마을 광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낙타의 목에는 ‘그림자 삽니다.’라는 글이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다가가자 낙타가 눈을 반짝였습니다.
상인은 아이에게 초승달처럼 생긴 칼을 건넸습니다.
마치 원하는 만큼 그림자를 자르라는 듯.
아이는 자기 팔뚝만큼 그림자를 잘라 낙타에게 주었습니다.
낙타는 아이의 그림자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더니,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두 번 깜빡이고, 삼킨 그림자만큼 금은보화를 토해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상인과 붉은 낙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동이 틀 무렵과, 해가 질 무렵에 마을사람들은 줄지어 상인을 찾았습니다.
낙타가 그림자를 먹을수록 혹은 높이 솟았고, 여전히 상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습니다.
낙타의 두 번째 혹도 우뚝 솟을 무렵, 마을사람 어느 누구도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상인은 낙타와 함께 마을을 떠났고, 마을에는 더 이상 해가 뜨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너는 마지막 남은 촛불을 끄러 교실 구석자리로 갔고, 시시하다는 나에게 너는 낙타가 비싼 값을 주고 삼킨 건 사실은 영혼으로, 그러니 절대 그림자를 잃지 말라고 했어. 영혼을 뺏긴 이는 죽어서 그림자도 없다며. 그림자가 없는 건 죽은 사람이라고.


죽은 사람은 그림자가 없다더니 진짜일지도 모르겠어. 너는 그림자도 없이 나에게 찾아왔잖아. 나는 나대로 네가 떠나고 너무 힘들었어. 밥도 못 먹고, 먹으면 토하기도 했어. 평상시처럼 ‘내일 봐’라는 말을 건네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항상 내일 봐, 했었잖아 우리. 그 인사를 안 해서 네가 흔한 영화의 진부한 클리셰처럼 갔다며 스스로를 저주했어. 그리고 네가 꿈으로 찾아왔어. 49일이 되던 밤 같은 건 아니었어. 오히려 일주일 뒤인가 그랬어.

우리는 그림자가 없는 밤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매점에 어떤 빵이 제일 맛있는지, 떡볶이에 순대를 찍어 먹어야 하는지 튀김을 찍어 먹어야 하는지, 갖고 싶은 이번 생일선물은 무엇인지. 마치 죽기 전날로 돌아간 것 같았어. 나는 이제 발 밑에 그림자가 돋아 나는데, 너는 계속 그림자가 없어. 이대로 깨버리면 내일부터 영영 널 잃을 것 같은 거야. ‘넌 정말 죽은 거야?’라고는 못하고, ‘내 그림자를 가져갈래?’라고 말했어. 근데 네가, “나, 괜찮아. 얘기 나눠서 좋았다. 그치? 이제 진짜로 가볼게.”라고 하는 거야. 아, 너는 나 괜찮으라고 왔구나. 마지막으로 못했던 그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와준 거구나. 안녕, 잘 가. 너는 정말 다정해.


얼마 안 가서 내가 밥을 먹어도, 토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참사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를 잃었어. 만우절도 아니었는데 다 살았다고 거짓말까지 했어. 그렇게 두 번 죽었어. 하얀 국화 사이로 교복 입은 영정 사진들이 즐비한 걸 보고 있자면, 그들은 아는 사람도 아닌데 혼자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근데 내가 이렇게 함부로 살아도 되나. 나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꿈도 없었는데,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누군가의 일기장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는 누군가의 평가와 좋아하는 인형이 잔뜩 있는 방을 보면 뭐라도 해야겠지 싶은 거야. 누군가는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었어. 꼭 너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어느 고등학생들의 삶도 같이 살고 싶었어.


유독 너한테는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해서, 너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게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어. 어느 하굣길에 입시 생활이 힘들어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나한테 네가 한 말을 기억해. 너는 대학에 가면 열심히 연애를 하고, 학생부 독서 기록을 위한 청소년 필독서가 아닌 정말 읽고 싶은 많은 책을 읽고, 신문사에 들어가고, 동아리 활동도 실컷 하면서 살거라 그랬어. 지금 이후의 삶을 그리면, 조금은 살고 싶어 질 거라고 그랬어. 나는 네가 원하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싶었어.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럴 수 있었어.


나 정말 열심히 살았어. 너의 위로와 꿈을 기억해서 딱 그렇게 살았어. 나는 대학에 가서 열심히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읽고, 대학교 신문사의 부장직을 달아보고, 동아리 활동도 닥치는 대로 다 하면서 계속 살았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냐는 말을 종종 들으면서.

사는 내내 나는 계속 널 그리워했어. 죽음 이후의 너의 삶을 이어 붙여서,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상상해보기도 했어. 성수동과 연남동 핫플을 꿰차고 있었을 것 같아. 주말만 되면 어디 같이 가자고 하고, 함께 핫플 도장을 깬 다음에 평점과 별점을 매기고 낄낄거렸을 것 같아. 너는 여전히 다정해서 힘들 때 먼저 알아보고 전화할 것 같아. 그럼 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잘 잘 수 있고. 글을 쓰면 너에게 제일 먼저 보여줬을 거야. 교수님이 좋아할까? 출판사가 좋아할까?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도 맥주도 와인도 말고 양주를 좋아했을 것 같아. 자취방에 놀러 가면 하이볼을 잘 말아주지 않았을까? 내가 술을 못하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하이볼잔이 아니라 소주잔에다가 따라주면서 놀렸을 것 같아.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 구체적인 너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괴롭고 즐거운 삶을 조금씩 더 지속할 수 있었어.

아, 글은 많이 쓰지 못했어. 글은 널 생각하게 해. 너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참 좋아하는 애였어. 우린 종종 야자시간에 이어폰을 나눠 라디오를 들으며 문자로 사연을 보내보거나, 잡지에 독자 투고를 하곤 했잖아. 그럴 때마다 네 글만 족족 뽑혀서 읽히고 상품도 받았던 게 생각나. 날카롭고 거칠었던 나와 달리 너는 따뜻하고 포근한 글을 썼던 게 기억나.


내 바람과 달리 너는 18살에 머물고, 나는 26살이 되었어.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 영정사진도 없이 하얀 꽃다발 사이에 포스트잇이 널린 걸 보면서, 어쩜 다들 나만 두고 그렇게 쉽게 죽는 걸까. 그건 참사가 아니라 차라리 살인에 가까웠지. 누군가는 사고라고 했어. 성수대교도, 삼풍백화점도, 세월호와 이태원도 다 사고래. 그렇게 치부하면 조금 쉬워지는 사람들이 있어. 남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신 갔어야 했는데. 아니, 나도 그렇게 쉽게 산다면 편할 텐데. 한편으로는, 가볍게 살지 못할 것을 잘 알아서 왜 계속 살아남는지 헤매. 예전에는 쉽게 사는 사람들과 줄곧 잘 싸웠던 거 같은데, 이제는 그럴 기력도 없어. 그냥 다 그만하고 싶어. 읽다가 질리면 책을 덮듯, 인생도 덮어버리고 싶어. 운이 좋아 너보다 더 살고 있으면서, 감히 죽고 싶다는 말을 내뱉어. 어쩌면 운이 좋아 죽은 게 아니냐는 말은 삼키면서. 사실 오래 살고 싶지 않아. 빨리 삶을 마치고 싶어. 목숨은 한없이 가볍고 너의 존재는 너무 무거워. 잊히지 않는 너의 다정함에 내가 오래도 더 살았어. 이젠 너 대신 뭘 열심히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만우절 아침에 덤프트럭에 치이는 게 나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어차피 나도 언젠가 가볍게 죽임 당해 버릴 거라면, 죽이기 전에 죽어버리는 게 좋겠어. 죽어버리면 어차피 다 그만일 것 같아. 아니 어쩌면 나도 이미 죽었나. 영혼은 죽고 육신만 남아서 생을 영위하는 게 아닐까. 이 육신을 죽이면 나는 진정 편안해질 수 있을 거야. 나, 죽는 거 안 무서워. 너는 18살에 머물러 있는데, 널 두고 나만 자꾸 나이를 먹는 게 더 무섭지. 점점 나는 너와 멀어지는 것 같아. 보고 싶어. 샤프를 쥔대로 굳은살이 배긴 가운데 손가락도, 여드름 자국이 가득했던 두 볼도, 두꺼운 안경알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작게 보이는 눈도. 나는 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네가 날 알아볼 수 있을 때 가야 할 텐데. 내가 너무 많이 커서, 네가 나를 못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자가 없다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림자가 없는 곳을 알아? 일 년에 단 이틀, 하와이에는 그림자가 없어. 태양이 정확히 90°위치에서 내려쬐는 라하이나 눈. 라하이나 눈에 나는 죽어서 역시 그림자가 없다고 믿고 싶어. 우리는 그림자 없이 또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랑과 이별을 했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썼는지, 네가 어느 날 어떤 때 생각났는지, 네가 그린 미래대로 사는 게 어땠는지. 네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것은 힘들지만 또 기쁜 일이기도 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니, 내 이야기는 사실 진부하고 평범하니까, 사실은 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죽음 이후 영원에서 나를 봤었는지, 내가 너의 바람대로 삶을 잘 해냈는지. 그곳은 기쁨도 슬픔도 없이 평온하기만 한지.

하와이에 발을 내딛는 상상을 했어. 그러니 조금은 살고 싶어 져. 당장에 내일은 일상으로 발을 내딛겠지만 나는 언젠가 하와이에 갈 거야. 이미 죽어버린 눈깔에 좋은 것들 가득 담고, 어차피 토해낼 위장에는 이름도 모를 비싼 것들을 채우고, 그림자도 없이 무지개가 시작하는 곳으로 갈게. 나 보러 와 줄거지?


그렇게 12시 16분에 죽어서 너와 함께하고 12시 43분에는 다시 살아서 혼자가 되겠지. 아, 정말 말 그대로 잔인해(1990년대 비숍 박물관이 후원한 경연에서 선정된 라하이나 눈(Lāhainā Noon)은 하와이어로 "잔인한 태양"을 의미하는 라 하이나(lā hainā)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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