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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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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25. 2023

원색적인 나날들

Primary days

친구의 집들이 날, 우리는 색깔별 간식 가져오기를 했어. 왜, 숏폼 콘텐츠를 계속 스크롤하고 스크롤 하다 보면 나오는 거 있잖아. 빨강을 맡은 사람은 빨간 옷을 입고 빨간 포장지의 간식들을 사 오는 거야. 새우깡이나 프링글스 오리지널 맛 같은 거. 이것도 주로 무지개색으로 한 사람당 색깔을 하나씩 맞춰서 가더라고. 인원수가 적으면 적은 대로 수에 맞춰서 삼원색 정도로 준비해서 만나는 재미가 쏠쏠해. 


빨강은 새우깡, 주황은 오감자, 근데 노란색을 맡은 애가 뭘 사 왔는지 알아? 글쎄, 고구마 케이크를 한 판 사 왔어. 누구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를 준비해 온 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꾸덕한 고구마무스 위에 포슬포슬한 카스테라 가루가 잔뜩 올라간 고구마 케이크, 나 진짜 좋아하거든. 어디서 사 왔냐니까 동네 빵집에서 사 왔대. 그게 제일 맛있어. 한편으로는 분했어. 나는 보라색이었는데 그냥 평범하게 포도주스랑 보라색 포장지의 꿀꽈배기를 가져갔거든. 하, 블루베리 머핀이나 포도 같은 걸로 사갈걸. 남들이 사지 않을 만한 걸로 준비했다면 꽤나 즐거웠을 텐데. 이케아는 사실 블루베리 머핀이 제일 맛있는 거 알아? 진짜야. 미트볼이나 연어 필렛 같은 건 그만 먹고 블루베리 머핀 한 번 먹어 봐.


누군가, 널 보면 노란색이 떠올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어쩌다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그 말만 기억나. 하도 많은 색 중에 왜 노란색일까. 혹시 내가 동양인이라서 노란색 같은 말을 한 건가? 근데 나는 되게 하얀 편인데. 솔직히 백인이 막 하얗지는 않잖아. 걔네는 대개 빨갛지. 누구는 면접에서 시각장애인에게 노란색을 어떻게 설명할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랬어. 밝고, 따뜻한 색. 그런데 너무 뜨겁지는 않고 은은한 빛 같다고 말할 것 같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색이라고 덧붙였어. 필기할 때 주로 삼색 볼펜을 쓰곤 했는데, 여러 번 읽어야 한다면 당연히 노란 형광펜으로 직 그어서 표시했거든. 그래서 나는 은은하게 따뜻한 사람일 거라고,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사람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지.


우리는 샛노란 고구마 케이크를 푹푹 퍼먹으며 포커를 치고, 보드게임을 하면서 놀았어. 문득, 색이 사라져도 루미큐브를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어. 빨갛고 노랗고 파란 대신에 점박이, 줄무늬같이 패턴을 넣어서 무늬로 구분할 수 있게 큐브가 나올까? 


어느 날, 색이 사라지는 꿈을 꿨어. 이 세상에는 명도만 남아서 흑과 백만 존재하게 됐어. 하늘, 녹차, 피부색, 무지갯빛 같은 말들은 다 사라졌어. 색을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 신호등을 제일 먼저 바꿔야 했어. 파란불 대신 화살표가, 노란불 대신 손바닥 그림이, 빨간 불 대신 X표가 자리하게 됐지. 구분할 수 있는 건 그림이니까. 디자이너들은 앓아누웠어. 빛과 어둠만 남았는데 클라이언트들이 '좀 더 따뜻하게 해 주세요, 밝은 거 말고요.' 혹은 '더 차갑게 표현도 가능할까요? 어두운 거 말고요.' 같은 주문을 했거든. 근데 그걸 또 해내더라고. 색이 사라지기 전에도 '심플한데 화려하게 해 주세요.' 같은 의뢰도 해내는 애들이었으니 오히려 쉬웠을까?


색이 사라졌으니, 껍데기로 연명하던 것들은 폭탄을 맞았어. 대신 알맹이들이 알차졌지. 무슨 소리냐고? 줄 서서 먹고, 사진 찍던 인스타 맛집들 말이야, 다들 망했어. 다채로운 색이 사라졌으니, 분위기도 우중충해졌고, 제철 과일과 허브로 한껏 꾸민 디저트를 사진으로 박제해 자랑할 일이 없어졌고, 사람들은 맛과 품질을 더 중요시했어. 진짜 맛으로 승부하는 찐-맛집들만이 살아남았다고나 할까. 


의류업계도 마찬가지야. 다양한 색과 빛을 뽐내던 명품업계는 줄줄이 망하고, 대신 원단 시장이 대박을 맞았어. 다들 그렇게 촌스럽다고 욕했던 공대생 체크무늬나 크게 세 줄로 이루어진 티 같은 건 아쉽게도 유행하지 않았어. 그건 색이 사라지기 전에도 별로였잖아. 색이 사라졌다고 사람들의 미학까지 사라진 게 아니라고. 색이 거기서 거기니까 누가 더 좋은 원단을 사용하느냐의 싸움이었거든. 패턴이 어떻고, 모양새가 어떻고 하는 대신, 통기성이 어떻고 원단 혼용률이 어떻다는 말을 제일 먼저 했지. 이상형은 청바지에 흰 티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좋은 원단의 옷을 잘 찾는 사람이 됐어.


그러고는 잠에서 깼는데, 꿈과 다를 것 없었던 회색 하늘을 맞이했어. 여느 날처럼 회색 후드에 검은 바지를 입고 산책을 나섰어. 누가 나를 보면 노란색이 떠오른다는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나는 원래 색채가 없다며 꿈처럼 살더라고. 어쩌면 색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나만 영영 색을 잃은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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