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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5. 2016

감금, 중노동, 매질, 죽음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29_형제복지원 피해자 김대우


 열 살짜리 아이는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경찰은 길가에서 놀고 있던, 엄연히 보호자가 있는 아이를 시설에 넣었다. 끌려가는 동안 아이는 부모의 이름과, 다니는 학교와 반 까지 반복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경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거리에서 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는 형제 복지원 안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악몽보다 더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주례동 산 18번지에 있었던 부랑자 강제 수용소다. 구타와 강간 등의 인권유린이 횡행했고, 누구도 그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12년간 5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김대우는 그것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거기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의 온 몸엔 수많은 자해와 자살 기도 흔적들이 역력했다.         






Q . 형제복지원에 들어간 것이 언제였나요?     


A . 1981년 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열 살 때 였으니까요. 저는 71년생이고요, 진구 부암동 2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김대우고요. 태어났을 때는 집이 부유했는데, 여섯 살 때 부모님이 떨어져 살게 되면서 형이랑 저를 성지고아원(현 성지 유치원)으로 보냈어요. 어머니가 삼륜차를 타고 한 번 씩 찾아오긴 했어요. 김진탁 원장님이셨는데,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형이 엄마 찾으러 가서 같이 살자고, 도망가자고 해서 같이 성지 고아원을 나왔어요. 형이랑 부산상고 자리에 있던 육교에 엎드려서 구걸도 하고, 껌도 팔고, 박카스에 우루사 하나 붙여서 팔기도 하고, 하면서 자랐어요. 그러다 고모부 집으로 갔는데, 고모부 집은 범전동 경마장 옆이었어요. 거기서 성지초등학교를 다녔어요. 3학년 11반. 1층 끄트머리 교실이었지요. 처음엔 고모부 집에 있다가 부전 여인숙에서 기거하게 됐어요. 열 살 때, 여름이라서 방이 더우니까 부전역 앞 파출소 앞에서 놀고 있는데 경찰이 날 막 끌고 들어갔어요. ‘아저씨 저 학생입니다, 우리집 바로 뒤 부전 여인숙이예요. 성지초등학교 3학년 11반입니다’해도 안 믿어줘요. 그냥 파출소 안에 가둬 두다가, 새벽 되니까 파란색 탑 차가 와요. 차를 타니까 애들 몇 명이 벌써 있어요. 집에 보내들라고 많이 대들었는데, 소용없었어요. 차가 형제복지원 안으로 바로 들어가서 차에서 내리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쭈 때려요. 발로 밟고, 단단한 나무 몽둥이로 때리고. 4~50대 남자들이었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똥을 다 쌌어요. 맞아서 터지고 피가 나고 하는데도 연고 하나 발라주고 끝이었어요.    



Q . 거기가 형제복지원이란 걸 알았어요?    


A .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형제복지원. 사무실 좌측에 대운동장이 있었는데, 우리한테 흙벽돌을 찍게 했어요. 요만한 네모 틀이 있는데, 흙을 넣고 한 두 사람이 꽉 누르면 벽돌이 만들어져서 통 튀어올랐어요. 엄청 무거워요. 그걸 지고 건물 짓는데 나르게 시켰어요.     



Q . 거기 몇 명 정도 있었나요?    


A . 우리 ‘한 소대’가 40~50명이었어요. 소대가 28개였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나중엔 더 많아졌지요. 형제복지원에 몇 천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을 거예요. 철제로 된 2층 침대인데, 양쪽으로 그런 침대들이 쫙 있어요. 소대 안에 소대장, 서무, 조장 식으로 서열이 있어요. 하나가 잘못하면 소대 전체가 다 빠따를 맞아요. 소대장도 조장도 다 같이 잡혀온 사람들인데, 수용자가 수용자를 감시하고 때리는 거예요. 얼굴이 예쁜 남자애들은 밤에 성추행도 많이 당했어요. 같은 나이라서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한명이 조장이 되면 태도가 달라져요. 나는 존댓말을 해야 하고, 친구였던 조장은 욕설을 막 해요.     



Q .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하던가요?    


A . 아무것도 안 해줘요. 이상한 하얀 알약 하나 주고말고. 달달한 시럽 같은 거 한 숟가락 주고요. 밥 먹을 땐 쇠로 된 식판에 밥, 국, 반찬 이렇게 나오는데, 건더기도 없는 국이에요. 밥 양은 ‘많이’나 ‘보통’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밥 같지 않아요. 쌀은 아주 조금 있고요, 새까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잡곡이 제일 많았어요. 소금에만 절인 배추하고, 전어젓. 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몰라요.     




Q . 형제복지원에서의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 내 인생이 완전히 망했어요. 81년에 가서 82년에 고모부가 찾으러 와서 나왔다가, 또 학교 다니다가 또 잡혀갔어요. 아버지가 배를 타셨는데, 83년에 아버지가 찾으러 왔어요. 김대우, 귀가! 하길래 나갔더니, 아버지가 있어요.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알고 보니까 형도 형제복지원 안에 있었어요. 따로 잡혀 가서 생활하다가 보긴 봤는데, 같이 지내지 못했거든요. 형이랑 같이 아버지 손잡고 나왔어요. 그 뒤로도 다시 잡혀갔으니까, 총 세 번을 간 거죠.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게 늘 따라다녔어요. 십대 후반부터 전과가 붙었어요. 어딜 가도 오해를 받고, 경찰은 늘 사소한 일로 날 잡아가고요. 쌀집 아저씨에게 말하고 잠시 자전거를 빌려 탔는데, 아줌마가 신고를 했어요. 그거부터 시작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과가 계속 돼요. ‘서면파 부두목’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잡아가기도 하고요. 10대 였어요. 조폭은 무슨 조폭이예요. 항의를 하면 몸싸움이 되고, 그게 공무집행방해가 돼요.     



Q . 자살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요.    


A .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너무 억울하니까, 죽으려고 몇 번이나 내 몸을 찔렀는지 몰라요.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육교에서 거꾸로 뛰어내렸는데, 달려오던 트럭이 내 어깨를 받았어요. 그리고 한독병원에서 눈을 떴어요. 어떻게든 목숨이, 이어지려고 했던 것 같아요.     



Q . 마지막엔 어떻게 나오셨어요?    


A . 나올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잠시 형제 복지원 안에 야간 초중학교가 생겼어요. 거기서 공부를 했어요. 제가 학교는 올바로 못 다녔지만 머리가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도 간판 글씨 보도 글을 배울 정도였거든요. 공부를 잘 하니까 형이랑 저를 85년에 서울 ‘소년의 집’으로 보내줬어요. 얼마 전에 그 소년의 집에 가서 제 서류를 찾았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수용 중 전원’이라고 적혀 있지요. (보여주심) 분명히 85년에 들어갔는데, 83년이라고 적혀 있죠. 엉터리예요. 우리 아버지 성도 김 씨인데 이 씨로 적혀 있고요.     





Q . 그때의 가해자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A . 마음으로는 죽이고 싶죠. 나이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도 편하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아부 같은걸 할 줄 몰라서 소대장에게 잘 보이지 못했어요. 편하게 살려고, 잘 보이려고 그랬다고 생각하려고 애써요. 그 당시에는 분통이 터졌지만요. 이해가 되더라고요.     



Q . 지금 형제복지원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A . 화, 목요일 마다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해요. 운전을 잘 하니까 가끔 주차 관리를 하고 있고요. 어제도 두 시간 해서 2만원 받았어요. 일하고, 시위하고, 형제 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에 함께 해요. 대표는 <살아남은 아이>를 쓴 한종선씨고요.      



Q . 내가 원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요?    


A . 배우고 싶어요. 학교 졸업장을 따고 싶어요. 나에게서 그 시간을 빼앗아 갔으니까, 그 시간을 국가가 보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 한종선이가 ‘국가에서 보상 받는 것도 목표지만, 원장 일가족들 재산 몰수 하는 것도 목표입니다’해요. 그것도 함께 목표로 둘 수 있지만, 저는 시위 계속 하는 것도 목표예요. 정낙인 기자님이 하시는 페이스북 ‘SNS 시민동맹’이 많이 도와줘요. 가입자가 아주 많아요. 우리가 받은 피해를 이해하는 분들이 그래도 많다고 생각해요.                 






형제복지원 원장은 자신의 땅에 운전 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을 시켰다. 그가 만들어 지고 날랐다는 벽돌은 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다. 홀로코스트의 행렬 뒤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남았고,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더러는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엄연히 현대에 발생한 이 사건은 원장이 횡령죄 등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 불법구금, 폭행, 살인 등에 대해 단죄조차 하지 않았다. 생존자 한종선 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 참상을 차마 옮길 수조차 없다. 원장이 횡령한 국고보조금이 12억 원에 이르지만 검찰은 7억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그는 항소심을 거쳐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5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가해자는 겨우 2년 6개월을 살았다. 가해자는 과연 원장 한명 뿐일까?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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