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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Dec 15. 2016

내가 있는 자리가 내 자리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30_파트타이머 조명옥

        



 몇 년 전, 나는 하단 오거리에 있는 작은 편의점에서 일 년 반 동안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후 9시부터 오전 9시까지 이어지는 12시간의 노동이었다. 최저 시급보다 훨씬 못한 시급을 받았고, 끼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 김밥으로 때웠다. 가장 힘든 것은 ‘혼자 일하는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손님들이었다. 욕설과 반말, 주정과 행패를 견디며 나는 점점 지쳐갔다.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미소 한번 지을 힘이 없었다. 

 서른한 번째 인터뷰이인 그녀는 내 단골 편의점의 파트 타이머이다. 오전에 편의점에 들러 에너지 음료 두 캔을 살 땐, 늘 그녀의 환한 미소와 안부 인사를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작은 편의점은 늘 그녀가 내뿜는 에너지로 가득 차, 먼 곳에 있어도 부러 그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파트타임은 어째서 그토록 행복한 기운을 가지고 있을까. 어느 날, 나는 변함없이 에너지 음료 두 캔을 사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는 역시 환하게 웃었다.           







Q . 평소에 늘,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A . 1972년생, 용호동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어요. 결혼해서도요. 애가 둘이고요. 예전에는 새마을 금고에 20년 다녔어요. 둘째 낳고 그만두고 좀 쉬었어요. 새마을금고 거래하시는 고객이 지금의 편의점 사장님이셨는데, 저한테 와서 일을 제의 하셨어요. 애들 때문에 되겠나 싶었는데, 아침부터 2시반 까지만 일하게 해 주셨고, 점심때 30분간 애들 점심 차려주러 가는 시간도 내게 해주셨고, 그 시간 시급도 다 주셨어요.     



Q . 애들은 몇 살이에요?    


A . 큰애는 5학년이고, 둘째는 여섯 살이에요.      



Q . 한곳에 계속 사시기가 쉽지 않은데요.    


A . 아주 어렸을 때는 용호 1동 시장 안에 살다가, 8살에 부산은행 사거리 쪽으로 이사 왔어요. 결혼하고 나서는 이기대 입구 쪽에 살고요. 공채 치고 새마을 금고에 들어가고 나서도 용호동으로 발령이 났어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어요. 결혼 하려고 하니까 시어머니가 직장 가까운 데로 집을 구하라고 해 주셔서 용호동에 집을 얻었죠. 어머니가 애기를 봐주셨으니까 친정이 가까워서 좋았어요.    






Q . 저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손님들이 힘들게 하지 않으세요?    


A . 여기는 아직 힘들게 하는 손님이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새마을금고 가질 때는, 손님이 진상부리면 마음도 많이 다쳤거든요. 여기서는 그런 일도 없고, 집에 있으면 속 아픈 일이 좀 특별히 있는데 일하러 오면 오히려 여유로와요.    



Q .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하세요?    


A . 간혹가다 예전에 아는 분이 오셔서 ‘그 좋은데 왜 그만뒀냐’고 물어요. ‘애 때문에 그만뒀습니다’ 하면 ‘애 낳고는 못다니나’ 해요. 내 맘인데요. 혹시 우리 딸이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걱정은 해요. 애들끼리 이야기 할까봐요. 가끔 딸한테 물어봐요. 엄마가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괜찮냐고요. 딸은 아주 좋대요. 요즘은, 일을 못하는 상황도 아닌데 일을 안 하는 게 부끄러운 거지, 이게 왜 부끄러운가, 하는 생각을 해요. 멘탈이 강해졌어요(웃음). 내가 있는 게 ‘내 자리’죠.      





Q . 집에 무슨 일이 있으세요?    


A . 우리 집엔 별 일이 없는데, 우리 조카가 속을 좀 썩여요. 친정에 살고 있는데 상황이 좀 안 좋아요. 이 녀석이 방황을 하는 시기라 이리저리 쫓아다녔어요. 어머니가 마음 고생하시니까 저도 걱정되구요. 그거 때문에 이만큼 확 올라오면, 엉뚱하게 우리 딸한테 터져요. 딸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그것도 마음 아파요. 다행히 조카가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이 좋은 분들이라서 잘 이끌어 주셨어요.     



Q . 새마을금고 다니던 시절은 어땠어요?    


A .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시험 쳐서, 20년 다녔네요. 대리였어요. 어렵다고 한명이라도 그만두라 하길래, 제가 그만뒀죠. 조금 더 버틸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 실적도 좋았거든요. 경력도 오래되고, 연봉도 좀 되니까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가 됐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애를 봐주시고 하니까 개인적으론 꼭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었거든요. 몇 년 치 월급이라도 더 받아서 나올걸, 하는 생각도 뒤늦게 들고, 내가 선례를 남겨놨으면 그 다음 사람도 그만두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미안해요.



Q . 워킹맘으로 일 할 때 힘들지 않았어요?    


A . 우리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셔서 오히려 전 편한 편이었어요. 일하고 있으면 점심시간마다 따뜻한 밥에 찌개 끓여서 매일 갖다 주실 정도였거든요. 고생하신다고 말려도 그러셨어요. 첫째는 엄마가 거의 다 키워 주시고, 일 그만둔 뒤엔 둘째를 제가 키웠어요.     



Q . 파트 타임의 좋은 점은 뭐예요?    


A . 일단 사장님이 좋으시고요, 혼자 일하니까 사람한테 안 부대껴서 좋아요. 새마을금고에선 경쟁이 심했고, 시기도 많이 당했어요. 시험 치고 들어온 사람들이랑 다른 방법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랑 서로 차이를 둬요. 업무 분담을 하다보면 분점에 갈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면 슥 지가는 말로 ‘또 본점이네?’그래요. 말도 꼭 하나 보태고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게 없잖아요. 마음이 편해요. 집에 있으면 잡생각 많이 날 거, 일하러 나오면 그렇지 않아요.     



Q . 번 돈을 어디에 쓰세요?    


A . 부모님이 78살이시만 아직 일하러 다니세요. 아버지는 부산박물관에서 청소 일을 오래 하셨는데, 허리를 다치셨어요. 생활비를 무척 아끼시는데, 그래도 생활비는 들어가니까 공과금을 내 드려요. 조카들 용돈도 조금씩 주고요. 큰조카가 군대에 있는데, 한 달에 5만원씩 적금 넣어주고, 작은 조카는 3만원씩 용돈 주죠. 나머지는 내 적금 넣고, 또 나머지는 저 쓸 거 써요. 우리 신랑한테 옷 선물하기도 하고 하면서 ‘내가 샀어, 이거 내가 샀어’ 그래요. 보약을 사주기도 하고요.          









 인터뷰를 마친 후, 그녀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손을 잡고 멀어져갔다. 아이는 끊임없이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고, 그녀는 때론 웃음을 터뜨리고, 때론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아이를 데리고 횡단보도를 건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시선처럼, 그녀가 원래 직장에서 근속하지 못했던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럼없이 파트타이머를 선택했고,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다. 만족도만큼 그녀의 노동은 존중받아야 하며, 우리는 편의점 카운터 안에 서 있는 사람이 ‘사람임을’ 의식해야 한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지구인이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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