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35 _ 딩크족 박경민(가명)
일주일 전, 그녀는 간단한 수술을 받았다. 가슴에 생긴 작은 멍울 두 개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하룻밤 입원한 새,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들은 그녀의 나이에 대해 묻고, 남편에 대해 묻고, 아이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쉰하나라고 대답하고, 남편이 있다고 대답하고, 아이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놀란 듯 되물었다. ‘왜 아이가 없어?’ 그 질문은, 그녀의 결혼 생활 내내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병실에서도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의 대답은 늘 같았다. ‘없을 수도 있죠?’ 없을 수도 있죠, 가 아니라, 없을 수도 있죠? 그녀는 되물음에서 되물음으로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되물음으로 끝맺는다. 없을 수도 있죠? 그렇다. 없을 수도 있다.
Q . 결혼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A . 스물일곱에 결혼했으니까, 24년 됐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비서직으로 서울에서 일했고요. 남천동에서 태어나서 남천동에서 자랐어요. 결혼한 이후인 지금도 살고 있고요. 옛날엔 남천동 광안리가 그냥 어촌이었어요. 동네 할아버지들이 나룻배로 고기 잡는. 엽서에 나올 법한 어촌 풍경이었죠. 원래 옛날에 광안리 살던 사람들은 새벽에 그 배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가서 아침에 들어와요. 바닷가에서 그물 터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어요.
Q . 어떻게 남편을 만나셨어요?
A . 남편은 해양대 학생이었어요. 해군 장교였죠. 그때 해양대 학생들은 40%가 지방에서 왔었어요. 남편이 전라도 사람이거든요. 대학은 가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면 공부 열심히 해서 육사나 해양대를 갔어요.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학교에서 다 해주거든요.
연애를 6년 했어요. 대학 동기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땐 마음에 안 들었어요. 못됐다고 생각했어요. 나한테 관심도 없어 보였고요. 제복은 근사해보였어요. 학교 와서 ‘그 남자가 날 마음에 안들어 하나 봐’ 그랬더니, 친구가 ‘그거 못 꼬시면 바보지’ 이러는 거예요(웃음). 100일 정도 하루도 안빠지고 신랑 학교에 뭘 보냈어요. 엽서 보내고, 편지 보내고요, 하다 안 되면 학교 신문 보내고요. 100일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해양대에 매일 갔어요. 나한테 넘어오면 헤어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웃음).
Q . 결혼 때 어떤 사회 분위기였어요?
A . 우리 때는 스물일곱이면 결혼에 대해서 약간 초조해하는 분위기였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친구도 많았고요. 4학년 때 꽂꽂이랑 요리 배우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나는 대학 졸업하고 일 했으니까, 스물일곱 쯤 결혼해야 했었죠.
Q . 결혼하시고도 계속 일 하셨죠?
A . 난 결혼하면 신랑이 돈을 이마안큼(팔 벌려보여 주시며) 벌어오는 줄 알았어요.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돈이 없으면 신랑한테 달라고 해야 하는데, 난 그 말이 참 안 나오데요. 처음엔 돈 벌려고 일을 계속했는데, 지금은 일이 좋아요. 애들 영어 가르쳐요.
Q .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죠?
A . 그냥 안 생겼어요. 불임의 원인도 없어요. 병원에서는 둘 다 이상이 없대요. 배란촉진제만 맞으면 확률이 높아진다는데, 그거 한번 맞는데 그 때 돈으로 주기별로 400만원이에요. 엄청 큰 돈이죠. 저 30대 때만해도 집이 5~6천이면 살 수 있었을 때거든요. 다 하는데 2천만 원이래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노력과 그런 돈을 써서 아이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남편이 그렇게라도 해서 가지자, 라고 했으면 했을 텐데, 남편도 썩 원하지 않았어요. 살다가 생기면 낳는 거고, 아니면 그냥 살자, 라고 얘기를 했어요.
Q . 시댁에서 뭐라고 하진 않으셨어요?
A . 많이 했죠. 시댁에선 에둘러 이야기를 못하세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게 사람에게 상처가 될거란 생각을 못하시고, 자기 빈손만 보시는 거죠. 자기만 너무 억울해 하시는 거예요. 언어 폭력도 많았고요. 내가 안 답답한데 내가 속 끓일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원하시면 시술 비용을 주시라고 했어요. 그 이후로는 말씀 안하셨어요(웃음). 상처를 받았던 기억은 그 때 밖엔 없었어요. 그 이후론 그냥 작은 일들이고요.
Q . 이를테면 어떤 일들이요?
A . 사람들은 가십을 좋아해요. 왜 애가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줘요. 원하지 않는 염려와 조언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어디가서 무슨 약을 먹어라’ ‘어느 병원에 가면 한방에 된다’ ‘어디 가서 기도를 해라’ ‘애받이 굿을 해라’ 그런 말들요. 첫 번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하면, 그 다음부턴 그 사람을 안 만났어요.
Q . 그럴 땐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A . 설마 내가 손 놓고 있겠습니까, 설마 제가 안 알아봤겠습니까, 라고 했죠. 이런 대화들이 계속돼요.
‘결혼 했어요?’ ‘네, 했어요.’ ‘애는?’ ‘없어요.’
‘왜 없어요?’ ‘그냥 없어요.’ ‘안 낳아요?’ ‘네.’ ‘왜요?’
Q . 요즘의 일상은 어때요?
A . 스포츠 댄스 배우러 다니고요, 소설 쓰기도 하러 다녀요. 이제 왈츠를 배우고요, 단편을 두 개 썼어요. 재미있어요. 내 계획대로 사는 게요. 강아지 두 마리도 키워요. 페퍼랑 브라우니. 푸들이에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미용도 제가 직접 하고요.
Q . 미래가 어땠으면 좋겠어요?
A . 지금처럼 만요. 지금처럼 살면 딱 좋아요. 이 일상이 좋아요.
Q . 지금 행복하시군요.
A . 네, 행복한 것 같아요.
나 역시 아이가 없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5년간의 결혼 생활엔 아이가 포함되지 않았다. 누군가 왜?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밖에 대답 할 수 없다. 어쩌면 나도 그녀처럼 대답한 적이 있을 순 있다. 없을 수도 있죠. 그러나 그녀와 달리, 나의 대답은 늘 우울했다. 그러게요, 왜 없을 까요. 나는 스스로를 ‘완전하지 않은 여성’으로 치부했고, 딩크족으로 자처하면서도 아이 낳는 것을 인생의 사명처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명쾌함을 환기시켜 주었다. 사실 그 보다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까. 긴 시간 동안 겪고 깨고 다시 쌓는 동안, 얼마나 많은 질문과 답이 그녀 안으로 쏟아졌을 것인가. 이제 그녀는 변함없이 명랑하고 유쾌하게 묻는다. 다시, 말이다. 없을수도 있죠?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