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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02. 2017

이국에서 만난 내 아내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6 _ 다문화 가정의 가장 장래국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노동으로 다져진 깡마른 체격. 오십이 넘은 중년의 남자가 내 작업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3년 전이었다. 소설 쓰기 지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입이 무거운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과묵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 나는 매주 그를 만나 원고를 수정하고 여러 가지 책이나 팟캐스트를 권했다. 그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온 아내가 있고, 더없이 예쁜 딸 둘이 있으며, 시츄 종의 강아지를 키운다는 사실을 일 년이 더 지나서야 알았다. 외국에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또 일 년이 더 지나서 알았다. 3년 동안 그의 문장은 천천히 좋아졌다. 연습장에 쓰던 원고를 스마트폰에 무선 키보드를 연결해 쓰게 되었고, 묘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기억의 편린들을 구체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새벽에 노동일을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그가 긴 시간 꾸준히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Q . 저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떤 분인지 소개를 해주세요.  

   

A . 올해 오십 일곱입니다. 딸이 둘 있는 가장이고, 낮에는 용역 일을 하고 있고, 일 마치면 소설도 쓰고 있어요.    


Q . 언제 결혼하셨죠?   

 

A . 서른한 살 때 했어요. 인도네시아로 가서 테프론(섬유의 일종) 일을 할 때였지요. 쉬는 날 근처 마을에 놀러가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는데, 가까운 마을에서 아내를 만났어요. 나보다 12살이나 어렸지만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어요. 일 할 때 몇 번 만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말했죠. ‘내가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너랑 결혼할 것이다’라고요. 근데 정말 인도네시아로 다시 돌아갔어요. 가자마자 결혼하자 그랬죠. 90년대 초반이니까 국제결혼이 많지 않을 때였어요. 결혼 하려면 영사관에 가서 신분 보장을 받아야 해요. 영사관에 물어보니까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한국인과 인도네시아 인이 결혼하는 거라고 했어요.  


  




Q . 신부 댁에 쉽게 허락을 받으셨어요?  

  

A . 인도네시아에서는 결혼 할 때 동네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모계사회라 그 동네 전체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씨족마을이었어요. 처음에는 동네 전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까 좀 그랬는데, 막상 닥치니까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쉬웠지요. 내가 총각이라는 것도 처가에서 좋아했고, 이슬람 문화권이라 남자가 처를 넷까지 둘 수 있는 분위기에서 한국이 일부일처제라는 것도 좋아하는 분위기였어요. 내가 그 나라 언어도 조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어 소통의 문제도 없었어요.   . 


 

Q . 외국인 신부를 데리고 왔을 때,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요? 


A . 자세히 보거나 말을 해보지 않으면 외국인이란 걸 잘 몰랐어요. 한국 사람과 생김새도 비슷하고요. 오히려 내가 까맣고 이목구비가 독특해서 가족사진을 본 사람들은 내가 외국인 인 줄 알아요. 나는 외부적으로는 편협한 시선을 받을 때가 없었는데, 아내는 우리나라 관습을 이해하는데 힘들어했어요. 고부갈등도 있었고요. 어머니는 옛날 사람이니까 이거저거 막 시킬 줄만 알고, 와이프는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잘 이해 못하고. 거기다 국제결혼 한 커플이 잘 없을 때니까 초반엔 친구들이 없어서 힘들어했어요. 지금은 한국산지 오래되니까 아내도 한국인 친구, 같은 나라 친구, 많이 생겼지요.  


   








Q . 아내는 친구를 어디서 알게 되시나요?   

 


  A . 5년마다 대사관에 비자를 갱신하러 가야 해요. 거기 가서 친구들 많이 만나고 오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외국인 아내들이 국적을 다 한국으로 바꾸는데, 그때는 대사관 직원도 별로 권하지 않았어요. 국적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고 갱신하는데 크게 어려운 것도 없고. 아내가 인도네시아 국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 나라에 다시 가는 것도 편리하니까. 





Q . 아이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나요? 

   

A . 둘 다 한국말만 해요. 아내가 한국말을 잘 하거든요. 1992년에 첫 딸을 봤고, 94년에 둘째가 태어났어요. 딸 둘은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걸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아내가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어를 따로 배울 일이 없었어요. 애들이 다섯 살, 세 살 때 인도네시아에서 3개월간 살았는데, 그땐 그 어린 애들이 3개월 만에 그 나라 말을 배우더라고요. 한국 돌아와서 1년 만에 다 잊어버렸지만. 

    





Q . 딸들의 결혼에 관한 생각은 어떠세요?   

 

A . 딸들의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되기도 했어요. 싫은 결혼을 억지로 시킬 마음도 없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반대할 생각도 없어요. 하지만 만약 딸이 국제결혼을 한다면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국제결혼은 단순히 남자 여자가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맞춰 가야 하는 거니까. 서로 오랜 시간 동안 이해하고 갈등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그 과정을 딸들이 겪게 하고 싶진 않아요.  

      







언젠가 가족 관계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즈그끼리만 친해요. 딸들과 어머니의 결속력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 가장은 조금 쓸쓸해보였다. 그는 자신이 쓴 단편 소설들을 딸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고 했다. 딸은 빙긋 웃으며, 단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잘 썼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은 저녁 10시경.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온 딸의 목소리는 씩씩하고 서슴없었다. 아빠, 나 오늘 회사에서 회식 있어서 좀 늦게 들어가면 안 돼? 사실, 그에게 딸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다. 그러나 그는 부산 남자고, 나이 많은 가장이다.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글쓰기 하러 왔다. 나중에 전화해라. 피식 웃음이 난 것은 나 혼자 뿐이었을까. 다문화가정이 겪는 편견을 부모에게 애써 전하지 않는 그의 딸들이 대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견한 딸들의 아버지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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