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달력

나는 알 수 없는..

by 졔졔맘

"김장해야 되는데..."

내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옆에 앉았다. 굵고 휘어진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 마디를 습관처럼 주무르면서 엄마는 혼잣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날 아직 따시구먼 무슨 김장이래.."

귀찮은 내 대답에 나름 무뚝뚝한 애교를 실어봤다. 엄마는 곧 추워진다며 가만히 손가락을 셈하듯 튕긴다. 곧 집안에는 배추들이 푸른색을 뽐내면 자리를 잡을 것이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어디에도 안 쓰일 버건디 컬러 다라 통에 소금 목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나하고는 전혀 다른 엄마의 스케줄이 가득 적힌 달력이 있다. 나이 드셔서 좀 줄긴 했지만, 빼곡한 스케줄표에는, 달래 된장찌개, 냉이 부침개, 동짓날 따끈한 팥죽과 고소한 부럼, 부지런히 갈아서 살짝 얼리고 소금 간한 콩국수..


거진 두 달 전에 왼쪽 어깨 수술을 하신 뒤, 부쩍 힘들어하시는 시간이 길었다. 수술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거냐고 매번 하고 난 뒤에 더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셨었다.

2-3년 전 오른쪽 어깨 수술.

작년 허리 수술.

올해 왼쪽 어깨 수술.

허리 수술을 한 뒤로 수술한 부위 아래쪽이 갑자기 망가지면서 다음 허리 수술이 예약되어 있으며,

요즘 부쩍 아파하시는 오른쪽 무릎도 걱정이다. 연골에 좋다는 보조제는 매번 잊어먹는 비타민과 다르게 정말 열심히 챙겨드시고, 땀 흘리는 게 싫어서 정말 잘 안 움직이지만 어떻게든 걸어보려고 하시는 모습에 코 끝이 시큰할 때가 있다. 그런 불편한 몸에도 엄마는 자신의 달력을 충실히 이행하신다. 요즘 간간이 대하를 알아보시는 걸 보면 또 제철이라는 것이 나타났나 보다.


그리고 요즘의 가장 중요한 스케줄인 김장까지..


나는 요리에 젬병이다. 요리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비효율적인 것인지 애 둘을 낳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가 7살이 될 때까지 당직이다 뭐다 집에 있는 날이 없었다. 엄마의 수술 후, 요리라는 것을 급하게 해 보면서 근본 없는 레시피와 너무나 미약한 실력에 부끄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이는 얼마나 솔직한지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간을 봐준 음식은 잘 먹고 오롯이 나 혼자 만든 음식은 거진 남기기 일쑤였다. 오늘도 두 시간을 계속 서서 재료를 다듬고 볶고 지지고 삶고 찌고 했는데도 완성된 요리는 4가지였다. 감자채볶음, 김치찌개, 메추리알조림, 동태 전… 간본 다고 음식을 계속 뒤적거렸더니 배도 안 고팠다.


“우아.. 엄마, 요리라는 건 정말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맞아. 그래서 이젠 참 하기 싫더라.”


그러면서도 김장을 고민한다니…

종잡을 수 없는 현실의 시계 속에 엄마의 달력은 참으로 성실하게 스케줄을 수행하고 정리되어 간다. 이 나이 되기 전에는 우리 엄마 부지런도 하다 하며 귀찮은 심부름이 생길 때마다 짜증이 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스케줄이 엄마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이제야 안다.


어느 날.

통통한 배추가 좁은 현관문 앞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보고 엄마의 겨울 달력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대로 따르게 될지 모르는 그 달력. 아직은 충실히 챙길 자신도 실력도 없다. 이 모든 게 그리움이 될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친구 세 명, 그중에 한 명